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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23. 2017

#03, 헨로고로가시(お遍路転がし)를 넘다

구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 (for #12~#13)

2015년 10월 16일 금요일 맑음


12.9km - ⑫焼山寺(Shōzanji) - 11km -  神山溫泉 - 10.5km(자동차) - ⑬大日寺(Dainichiji)          


길에서 생각을 하고 싶어 떠나왔는 데 길에 치여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셋째날이다.

어제 힘들었던 만큼 후유증이 이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 데 아침이 되니 다시 말짱하다.

요시노료칸에서도 조식은 6시부터 가능, 다행히도 낫또와 날계란은 없다. 적어도 나한테는 당분간 조식의 기준이 낫또와 날계란이 있는지 없는지로 판가름나게 될 것 같다.


어제 저녁을 혼자 했으니 예닐곱 명이 식사를 하는 공동식당에 아는 얼굴이 없다.

혼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앞자리로 백발의 노신사 한분이 와서 앉는다.

식당에서는 점심 도시락으로 오니기리도 팔고 있다. 산행이 있는 날이니만큼 도시락은 필수란다. 어제 편의점에서 사둔 게 있는 나는 그냥 식당을 나오고, 앞에 앉으셨던 분은 도시락을 사들고 나오면서 내게 몇시에 출발할거냐고 같이 출발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내심 혼자 산행을 할 게 걱정이던 터라 6시반에 만나서 같이 출발하기로 한다.


12번 쇼산지(焼山寺)는 어제 마쳤던 11번 후지이데라 뒷편에서 등산로로 이어진다.

후지이데라까지 가는 10분 여 짧은 시간 동안의 짧은 대화 속에서 서로 한국인임을 알아본다.

일본인이겠거니 하고 둘 다 일본어로 얘기하다가 당연히 묻게 되는 수순, 어디서 왔는지에서 뾰록이 난거다.

아하, 식당에서 알아 봤어야 했다. 그분이 입고 있었던 코*롱 등산티셔츠가 한국 브랜드란 걸 깜박했다. 외국브랜드가 판치는 세상이니 미처 인지를 못했던 거다. 기리하타지 아래 배낭을 맡겼던 상점에서 얘기했던 한국인이 알고보니 그분이셨다. 그곳에서 불편한 스게가사를 새로 사셨단다. 험한 산길을 한국인 박선생님과 같이 가게 되서 무척 다행이다.


쇼산지까지는 12.9km 산길이다.

순례자를 데굴데굴 구르게 만드는 헨로고로가시(お遍路転がし)가 6군데나 있다는 악명높은 그 길인데 실제로 도 그러할지는 걸어봐야 알 터, 지나치게 무거운 배낭만 아니면 걱정이 크진 않겠는데 역시나 도시락과 물까지 첨가된 배낭이 제일 버겁다. 사진을 하면서 끊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때 등산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으니 해발고도 1000m도 못되는 산행이 무얼 그리 어려우랴 하고 스스로 자신감을 불어 넣어 본다.

시코쿠 오헨로미치의 해발고도와 사찰 사이의 거리 ; 해발고도가 높은 곳은 미리 2~3일전에 숙소를 물색해 놓는 것이 좋고 가급적 산행이 시작되는 시점과 가까운 곳의 숙소가 좋겠다


결과적으로 해 볼 만은 했다. 물론 많이 힘들었다. 혼자였으면 많이 무섭기도 했을 거다.

일본의 산은 해발고도에 비해 삼림이 빽빽이 우거져서 낮에도 어둡고, 아주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곳곳에 멧돼지가 파헤쳐놓은 흔적들이 보이고 뱀도 자주 출몰하므로 콩고즈에가 뱀 퇴출용으로도 쓰인단다.

6시 반에 출발해서 6개나 된다는 헨로고로가시를 셀 틈도 없이 정신줄 놓아가며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다가 10시쯤 되었을까 또다시 죽을 것 같은 계단을 오르니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삼나무 아래서 코보대사가 내려다보고 있다.

잠시 물과 간식으로 요기하고 다시 걷기를 반복, 그 후로도 3시간 이상을 더 걸어서 쇼산지에 도착한 시간은 무려 1시 반이다. 아무리 산길이라도 12.9km를 7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자주 쉬고, 물마시고, 신발벗고 양말벗어 발도 말리고 했지만 말이다.

중간에 여럿 일본인 오헨로상들도 만나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는데 그들도 많이 지친 모습이면서 내 배낭을 보고는 스고이 스고이 감탄사를 연발한다. 오랜 벗인 듯 보이는 초로의 여자분 둘은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기도 했다.


산중이라선지 쇼산지에는 유난히 수령이 오랜 나무들이 많다. 그리고 식당도 있다. 박선생님이 우동을 사주셔서 맛있게 먹는다. 참배는 대충인 나와는 달리 박선생님이 웬지 뒷모습이 무겁게 합장시간이 길다.

누구나 저마다의 삶의 무게는 있는 걸까.





다이니치지(大日寺), 나중에 안거지만 시코쿠에는 다이니치지가 셋이나 있다. 첫날 걸었던 4번부터 시작해서 한국인 주지스님인 김묘선 선생님이 계시는 13번과 28번이 모두 같은 이름이다. 웬지 모르게 일본 극우주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 거부감을 들게 만드는 이름이었지만 알고보니 대일여래( 大日如来), 즉 진언종의 본존은 우주를 비추는 태양으로 만물의 자모라고 일컬어진단다.




오늘 일정은 조금 편법을 쓰기로 했다. 오사카에서 만나 도쿠시마로 같이 들어왔던 김묘선 선생님의 다이니치지는 쇼산지에서 출발해서 가장 빠른 코스로 가도 21.5km나 되는 거리다. 13km 산행 후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보통은 쇼산지에서 3km를 내려온 나베이와소나 거기서 5km쯤을 더 가서 우에무라료칸에 숙박을 하는 경우가 많은 데 나는 김묘선 선생님과 카미야마온천에서 만나 온천욕을 하고 선생님의 차로 다이니치지까지 가기로 한 거다.


쇼산지를 내려와서 박선생님은 다이니치지로 가는 빠른 길, 등산로로 다시 접어들고 나는 43번 도로를 따라 카미야마온천으로 향한다. 다이니치지를 10km쯤 남겨둔 곳에 묵을 예정인 박선생님과는 내일 아침 다이니치지에서 만나기로 하고서.

오헨로역에서 박선생님과 헤어져 내일 아침 다이니치지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카미야마온천까지도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구글맵을 검색해보니 11km, 2시간 50분 걸려 주시겠단다.

등산 후에 아스팔트 내리막길을 걷는 게 얼마나 발이 쏠리고 아픈지 이때까지는 미처 몰랐었다. 나날이 새롭게 힘들어지는 느낌, 3일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무겁다 못해 허리까지 아파오게 하는 배낭을 지고 초주검이 되어 4시 반 쯤에야 카미야마온천에 도착한다. 잠시 후에 김묘선 선생님과 아버님, 그리고 제자까지 세 분이 오셨는데 제자분이 내 배낭을 차에 실으면서 그 무게에 질려한다.

온천욕은 정말 최고다. 이제 겨우 사흘이지만 시코쿠를 걸으면서 버티는 힘은 날마다 욕조에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그 짧은 시간인 듯 하다. 더구나 오늘은 진짜 온천이니 온탕, 냉탕, 와인탕까지 넘나들며 제대로 즐기는 데 김묘선 선생님은 승무를 하셔서인지 얼마나 몸이 잰지 모르겠다. 젊은 대학원생 제자와 띠동갑인 나보다 훨씬 빠르게 동에 갔다 서에 갔다, 한증막에 들어갔다 하면서 분주하게 온천욕을 즐기신다.

한증막에 들어가니 쇼산지 가는 길에 그 힘들어서 넋이 나간 표정이던 초로의 여자분 두분이 반갑게 나를 맞으면서 박선생님 안부를 궁금해 한다.


온천욕 후에 온천에 딸린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메뉴가 다 맛있다며 김묘선 선생님이 권해 주시는 돈까스와 생맥주를 두 잔이나 벌컥벌컥 마시는데 그리 달 수가 없다. 올해로 83세가 되신다는 선생님의 아버님은 많이 못 드시는데 맥주까지 연거푸 마시자니 조금 죄송한 마음도 든다. 게다가 입욕료도 식사도 맥주도 극구 선생님이 지불을 하셔서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렇게나 폐를 끼쳐도 되는건지...




아루키헨로(걷는 순례자)인 내가 차로 이동을 해서는 안되는 거지만 원칙도 간혹은 깨는 재미도 있는 거니깐, 이 걷지 않은 10여km를 기억은 하자면서 선생님 일행과 차로 다이니치지로 이동, 슈쿠보에 묵는다.

직원들은 모두 일본인, 담당자분한테 숙박비를 치르는 데 5천엔이란다. 선생님이 배려해서 깎아준 건지, 저녁을 제외해서 그렇게 싼 건지 여쭤보지는 못하고, 세탁과 유카타를 추가해서 5400엔을 지불한다.


슈쿠보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고, 긴 복도는 일본 사극드라마 오오쿠(쇼군의 처첩들간의 암투를 그린 연작 드라마로 일본판 여인천하)의 칸노미호가 걸어나올 듯한 분위기다.

도코노마까지 있는 드넓은 방에 누우니 옆방에서 두 명의 여자 오헨로상이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가 고스란히 들려온다. 선생님께서 내일 아침 예불에는 나와도 되고 안나와도 된다셨지만 생전 처음 일본 절에 묵는 김에 6시예불에 들기 위해 귀를 막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다이니치지 슈쿠보에 묵은 방을 아이폰 파노라마로 담아봄




다이니치지 슈쿠보(1식) 5400엔

납경(12번) 300엔


총 5700엔

이동거리 12.9km + 11km (神山溫泉) + 11km(자동차로 다이니치지까지)




https://brunch.co.kr/@eslee2662/5


https://brunch.co.kr/@eslee26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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