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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25. 2017

#04, 순례를 이어갈 수 있을까

긴장이 풀리니 위기가 찾아오심 (for #13~#17)

2015년 10월 17일 토요일 계속 맑음


13 大日寺(Dainichiji) - 2.3km - 14 常楽寺(Jōrakuji) - 1km - 15 国分寺(Kokubunji) - 1.7km - 16 観音寺(Kanonji) - 2.9km - 17 井戸寺(Idoji) - 6.3km - 아그네스호텔


난 멀쩡한 데 카메라가 탈나기 시작, 불안불안하다


다이니치지에서 잘 잤다.

겨우 4일째인 데 이제 알람 없이도 5시에 눈이 떠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찌나 적응력이 뛰어난지!

일상에선 아침 7시에 일어나는 것도 전쟁인 데 역시나 여행 체질인가 보다.


6시의 아침 예불에 참가한다. 지난 달 불갑사 2박3일 템플스테이에서도 아침 예불은 커녕 5시부터 꽃무릇 밭에 삼각대를 꽂았던 내가 난생 처음으로 불교 예불에 참여해 보는 거다.

언뜻 보아도 한국의 불당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신도는 조촐했는 데, 어제 옆방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여자분 둘은 아루키헨로가 아닌지 일상복 차림이고, 남자분 하나는 목에 와게사까지 오헨로 복장의 모범답안인 모습으로 예불에 참가한다.

나까지 넷이서 의자에 앉은 후에 곧바로 김묘선 주지스님과 부주지스님이 들어오셔서 불상에 향과 절을 올리는 것으로 예불을 시작된다. 뭔지 모르게 경건하지만 의미를 모르겠는 의식과 불경 읽기, 또 다시 향을 올리는 등의 긴 의식으로 예불은 끝난 것 같다.

뜻밖에도 김묘선 주지스님의 진솔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불상 옆에 반듯하게 서서 설득력있는 목소리에 유창한 일본어로 당신의 삶을 술회하시는 거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외국인으로서 다이니치지 주지스님과의 결혼과 출산, 그리고 사별 후에 시코쿠 뿐만 아니라 일본 어디에도 없는 외국인 여자 주지스님이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 용기를 주었던 어린 아들과 가족, 배울수록 어렵고 아름다웠던 일본어, 그리고 아무리 되뇌어도 부족한 아리가또의 의미, 시코쿠 4개 현의 옛 이름에 부여된 아름다운 뜻, 일본어가 많이 부족한 내가 들어도 감동스러운 이야기다.

일본인들 앞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고 이매방 선생님의 승무전수교육조교로서의 열정적인 삶까지는 술회하시지 못하는 걸 본다.


선생님은 일일이 순례자들과 사진촬영까지도 함께 하는 걸로 예불을 마치고 우린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는다. 밥에 연연하게 된 나, 된장국과 연어구이, 우메보시와 닭광, 숙채, 멸치와 간 무우에 스다치즙까지 뿌려서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후식으로 귤도 챙겨 먹는다.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의 경내를 돌아보는데 본당과 대사당 사이에 아름다운 동상이 서 있다. 

기도하는 손 모양 안에 안치된 여자 관음상, 시아와세간논(しあわせ觀音)이라 하니 행복을 비는 관음상일 게다. 납경소에서 납경을 받고 건너편의 이치노미야 신사에도 가 본다. 다이니지치는 지역에서도 아주 격이 높은 이치노미야 신사의 사무를 보는 역할도 겸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김묘선 선생님은 참 바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 동행했던 박선생님이 올 때까지는 한두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터인데 그 때까지 배낭을 덜어 다이니치지에 맡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선생님께서도 내 짐이 걱정스러우셨는지 흔쾌히 맡아 두셨다가 내가 필요로 할 때 내가 묵게 될 숙소로 보내주시겠단다.

불필요하게 많았던 옷들 중에서 당장 필요없는 가을 옷 한벌과 등산조끼, 겨울용 다운조끼, 무게가 나가는 세면용품 일체를 지퍼백에 담아서 덜어내니 10kg 남짓의 배낭이 되었다. 이제서야 조금 무게가 만만해진다.

그러고도 빈둥빈둥 놀고 있는 데 9시가 되어서야 박선생님이 오셔서 참배를 하고, 납경을 받고, 김묘선 선생님과도 인사하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틀간 강행군을 한 지라 오늘은 한 숨  쉬어가는 일정이다.

첫날처럼 다닥다닥 위치한 14번 죠라쿠지(常楽寺), 15번 고쿠분지(国分寺), 16번 칸온지(観音寺), 17번 이도지(井戸寺)를 거쳐 처음 시작점의 도쿠시마 시내로 들어가는, 기꺼이 힘빼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허탈감도 생길만한 코스다.


14번 죠라쿠지까지는 2.3km, 박선생님과 느긋하게 걷는다.

동행이 있다는 건 든든한 면도 있는 반면에 불편함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박선생님과 어디까지 걸을 지 모르겠지만 살짝 염려스럽기도 하다. 혼자가 더 익숙한 내가 연배로도 한참 위이신 분과 보조를 맞출 수 있을 지 걱정이 되는 거다.


몸이 힘들어야 딴 생각을 않는 거지


이틀간은 걷는 데 치여서 아무 생각이 없다가 길도 편해지고, 배낭도 가벼워지니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는다.

게다가 카메라까지 말썽을 부려 죠라쿠지에서 처음으로 에러가 뜬다. 장기간의 여행이라 기껏 서비스센터에 방문해서 바디랑 렌즈랑 다 점검하고 왔는 데, 참 난감하다. 전원을 껐다가 켜면 잠시 찍히다가 도로 에러가 뜨는 현상이 반복된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거의 멘붕이 오기 일보직전이 된다.




죠라쿠지에서 지척인 15번 고쿠분지에서는 그래도 정상 작동이다.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현장학습을 나왔는지 발랄한 초등학생들 때문에도 기분이 살짝 나아지는 듯하다.


16번 간온지에서 급기야 카메라 셔터가 나가 버린다.

머리가 하얗게 된다. 절망적이다.

박선생님이 옆에서, 카메라가 일제인 데 여기서 as가 안되겠냐고 서비스센터에 가보자고 위로해 주시는 데 감사하지만 귀에 들어오진 않는다. 한국에서도 고장수리는 최소 일주일은 맡겨야 될텐데, 시코쿠 시골에서 가능할 지 의문이고 된다고 해도 나는 계속 이동중일텐데 맡기고 찾고 하는 일도 난감할 듯하다.




간온지를 나와 우선은 점심을 먹는다.

밥 생각도 없지만 일행이 있으니 거를 수는 없고, 박선생님과 우동을 먹는 데 도통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의기소침해 있는 내가 안됐는 지 박선생님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애를 쓰신다. 식당 근처의 전파사 같은 곳에다가 카메라 수리점을 문의해서 キタムラカメラ(키타무라카메라) 德島国府店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신 거다. 구글맵으로 검색해보니 17번 이도지에서 멀지 않기에 이도지 참배 후에 들러보기로 한다.


시코쿠의 절마다 코보대사에 얽힌 일화가 거의 하나씩은 있는데 이도지도 예외는 아니다. 이 마을의 우물에서 탁한 물 밖에 솟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을 겪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코보대사가 자신의 지팡이로 하룻밤 사이에 우물을 팠다는 설이 그것이다. 절의 이름에서도 무언가 우물에 얽힌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짐작했던 대로다. 

그렇다고 해도 사진을 아이폰으로밖에 찍을 수 없으니 흥이 나지 않는다.

이도지의 산문을 나서기 전, 흰 레이스보를 씌운 탁자에 할머니 두 분이 앉아 계신다. 탁자 앞에는 손 글씨로 'お接待'라 적혀 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오셋타이인가 보다. 

오셋타이는 오래 전에 수행을 하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던 문화가 그대로 남아 순례자들에게 가벼운 접대를 하는 것으로,  부처님에게 하는 공양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거절해서는 안된다고 들었다.

그러고보니 오셋타이라고 생각은 못했지만 첫날부터 같은 아루키헨로상이,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바나나며 귤이며 사탕이며 몇번씩 건네받았던 게 오셋타이였나보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 온다.

할머니들도 순례자들을 위해 음료를 따라주시고 손수 기워 만들었을 작은 주머니에 사탕 몇 알씩을 담아 건네 주신다. 당신은 늙고 힘이 없어서 순례를 떠날 수 없지만 힘들게 오헨로미치에 선 아루키헨로들이 당신 대신으로 88 사찰을 돌면서 복을 빌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평소처럼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런 작은 호의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키타무라카메라점으로 가서 점원에게 카메라를 내밀고 뭐가 문제인지 물어보는 데 딱 봐도 키타무라는 여러가지 메이커의 카메라를 취급하는 판매점이지 서비스와는 무관해 보인다.

아니나다를까 수리를 하려면 도쿄 본사의 수리센터로 보내야 하고, 원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2주 가까운 시일이 걸릴거란다. 순례중이라고 난감해 하니 전원을 껐다가 잠시 후에 켜보거나 해서 더 사용해보고 결정하라는 원론적인 답변이다.


도움되는 게 없어서 한국의 서비스센터로 전화를 걸어 문의하다가 짜증만 늘어난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점검을 받았는 데 이러이러한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무상 as기간이 지났다면서 점검은 점검일 뿐 고장이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점검 당시에는 이상이 없었다는,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커녕 책임소재를 먼저 따지는 거다.

무상as기간도 겨우 한달 정도 넘겼을 뿐이고, 무상이든 유상이든 고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냐니 카메라를 한국으로 보내지 않고는 뾰족한 방법이 없단다.

여행을 잠시 접고 돌아갔다가 다시 와야 하는 건 아닌지 참 심란하다.




다음 일정인 18번 온잔지까지는 18km로 빠듯하게 오늘 안에 갈 수도 있는 거리지만 이래저래 힘을 잃은 터라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도쿠시마 시내를 관통해서 가는 길이라 숙소 예약도 하지 않는다. 

6km 쯤 두시간을 걸으니 도쿠시마 역 근처다. 역시나 호텔이 즐비하다. 시간은 3시 반 정도.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오늘은 쉬어가기로 하고, 그만그만한 아그네스 호텔에 체크인한다. 호텔이니 간단한 조식만 나올 터인데도 6500엔으로 저렴하지는 않지만 가난한 순례자라는 신분도 오늘만큼은 다 귀찮다.


우선은 씻고, 잠깐 휴식으로 정신차린 다음에 박선생님과 로비에서 만나 근처 일식당으로 간다.

메뉴판을 보니 和風ダイニング  どまん中란다. 메뉴가 다양하다. 박선생님이 위로차 저녁을 쏘겠다고 몇가지 저녁 겸 안주와 생맥주를 주문한다. 

식사하는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말씀을 들어보니 일본 중견 기업체의 한국지사 대표 겸 일본 본사의 임원까지 겸하다가 얼마 전에 정년 퇴임을 하셨다는 박선생님도 신산한 삶을 살아오셨는 지 표정이 내내 어둡다. 


우리 모두는 이 여행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돌아와선 여행 수첩에 휘갈겨 쓴다.

  

      바닥을 치고 싶었다

     누가 뭐라든 넌 패배자라고 낙인찍고 싶었다

     스스로가 그걸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사진도, 일도, 사랑도, 삶도


      그치만 난 이미 거지같은 데 뭘 더 버려야 하는 건지

      그저 욕심을 놓고 조금만 편안해졌으면 싶다




아그네스호텔(조식포함) 6500엔

점심 1800엔

납경(13~17) 1500엔

세탁 100엔


도합 9900엔

이동거리 약 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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