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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eroon May 02. 2024

여덟 갈래

허상과 주술적 사물사이에

07:00 am

고엽제(枯葉劑, defoliant)가 만연한 마을은 전쟁 이후 정체불명의 질병으로부터 여전히 불안전하다. 전투기 넉 대가 비행하면서 모기와 거머리 퇴치를 위하여 고엽제를 스프레이 한다. 여덟 갈래 먼지 길이 난다. 은신처로서의 숲은 고사하는 삼림이 되고, 장악당한 경작지는 오랜 세월 썩어간다. 호흡기로 잎으로 뿌리로 흙으로 파고드는 무지갯빛 독성이 생명과 자연에 스며든다. M의 기사를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자라난다. 비무장지대 T마을은 오늘 잔칫날이다. 귀한 손님을 초대하고 음식을 준비한다. 아직까지는 상다리가 휘어지진 않는다. 먹고 마시는 일이 절실하다. 소중한 사람들과 서로에 대한 존중을 베풀고 나눈다. 


09:45 am

골든키위의 찔깃한 얇은 껍질과 말캉한 과육의 그 밀착된 경계를 과도(果刀, paring knife)가 천천히 지나가는 일_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_에 집중한다. 잘 깎여 떨어진 6-7센티미터가량의 쪽쪽 뻗은 아홉 피스의 손가락 닮은 과피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기분. 벗긴 껍질들을 가지런히 누이고, 주전자에 커피 두 잔 분량의 물을 담아 끓인다. 팔팔.


visitation


16:00pm

늦은 오후부터 활(弓, bow)을 낸다. 막순을 내고 무겁터로 내려가 보낸 화살들을 직접 줍는 일이 언제나 흥미롭다. 한과 통이 어떻게 맞았고 어떻게 어긋났는지, 한 시 한 시 허리를 굽혀 모래에 떨어진 살(矢)의 좌표를 눈으로 사진 찍듯 기록하며 줍는다. 모래를 밟는 두 발의 신발 바닥들. 면양말을 지나 맨 발바닥으로 다가서는 감촉이 새롭고 감사하다. 고전이 계시지 않는 날에 활을 내는 것 또한 득과 락을 준다. 활터에 강풍이 불면 노오란 송홧가루가 제트기처럼 일제히 출동한다.


18:00pm

고층 아파트 맞은편 오래된 성당의 종(鐘, ring)이 울린다. 매일 정오와 오후 6시 두 번 울린다. 부드럽고 진득한 종소리가 마음 깊은 속을 파고들면 실핏줄이 터지듯 팔방으로 흐르는 상념이 고요를 찾는다. 나란히 걷고 있는 커플의 뒷모습, 놀이터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이른 오렌지 저녁의 아름다움과 빗물 머금은 초록의 채도, 거짓 없는 일몰이 내린다. 초여름 바람 선뜻 불어오고 종소리가 울리는 1분. 은은 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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