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는 없는데 내게는 있는 것
어릴 적, 임신하신 친구 어머니의 배를 보며 '사람 배가 저렇게 커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도 임신부들의 커다란 배를 보면 지탱하고 다니는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아이가 들어있는 큰 배로 다른 아이를 척척 돌보시는 분들을 보면 경외감이 들곤 합니다. 언젠가 제가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저도 사랑스러운 배를 든든하게 지키면서 다니겠지요.
아기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기저귀부터 아기 밥, 쥐어줄 장난감, 유모차, 여벌 옷 등 한 보따리의 짐을 챙겨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기용 짐’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필요합니다. 대표적으로 아기가 안전하게 떠다닐 양수를 배에 같이 들고 다녀야 하죠.
따라서 신생아의 평균 무게는 3kg이 조금 넘는 정도지만, 마지막 달이 되면 엄마의 몸무게는 임신 전보다 10kg 이상 증가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평균 6.8kg가 배에 집중된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도 무겁습니다. 큰 제철 수박 하나를 뱃가죽 안에 넣고 다니는 셈이니까요.
그런데 무게 말고도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만약 6.8kg 더 무거워지고 튀어나온 배를 가지고 임신하지 않은 상태처럼 서있는 자세를 물리적으로 따져보면 앞으로 회전력을 받아 고꾸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튀어나온 배 때문에 무게중심이 몸 안이 아닌 몸 앞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발을 축으로 임신부의 몸이 앞쪽으로 회전하게 됩니다. 즉, 임신하기 전처럼 서있는다면 임신부는 매 순간 앞으로 엎어질 위험에 처해 있는 셈이죠.
그러나 임신부들을 보면 특유의 자세로 안정적으로 서있습니다. 이 자세를 신시내티대학의 캐서린 윗컴(Katherine K. Whitcome)과 하버드 대학의 다니엘 리버맨(Daniel. E. Lieberman), 그리고 텍사스 대학의 라이자 샤피로(Liza J Shapiro)가 파헤쳤습니다. ‘임신부가 앞으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이유는 뭘까?’를 말이죠.
앞으로 엎어지지 않기 위해, 임신부의 자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임신부의 자세를 따라 해 볼까요? 가슴은 그대로 두고, 아랫배를 앞으로 빼는 느낌으로 아래쪽 허리만 뒤로 젖힙니다. 해당 연구에서 임신부의 자세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엉덩이는 약 5.6˚ 틀어지며, 허리는 평균 18˚, 최대 28˚까지도 젖혀진다고 합니다. 이 자세가 바로 안정적인 임산부 평형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자세는 허리에 굉장히 무리를 많이 줄 겁니다. 특히 등과 가까운 쪽 척추 관절을 많이 누르게 되겠죠. 이 부분을 ‘후관절(Facet Joint)’라고 부릅니다.
임신을 하게 되면 임신 전보다 후관절에 무리가 훨씬 많이 갑니다. 임신부의 자세를 취하면 후관절이 받는 힘은 1.5배에서 2배 정도 더 증가합니다. 따라서 허리에 상당한 무리를 주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임신부들은 허리 통증을 달고 삽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여성의 요추는 남성과 두 가지 차이점이 있어 허리의 부담을 줄여줍니다. 참고로 요추란 허리 쪽 척추를 말합니다.
먼저 위 그림의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을 보시면 차이점이 보입니다. 남성의 경우 배 쪽과 등 쪽의 높이 차이가 없는 반면, 여성의 요추는 등 쪽으로 갈수록 좁아집니다. 즉, 쐐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거죠. 둘째로 해당 자세를 담당하는 뼈의 개수가 다릅니다. 임신부의 자세를 취하면 남성의 요추는 두 개의 뼈가 앞으로 움직여 곡선을 만드는 반면, 여성의 척추는 세 개가 움직입니다. 이 덕분에 여성의 요추는 각각이 받는 부담은 줄이면서 전체 척추의 굽은 정도는 더 증가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각 후관절이 받는 부담은 자그마치 30%나 감소한다고 합니다.
이 연구는 한 가지 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직립보행에 따른 진화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인간과 가까운 유인원인 침팬지에게서는 성별에 따른 요추의 차이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침팬지의 경우 앞다리 두 개, 뒷다리 두 개를 이용해 4족 보행을 하기 때문에 임신했을 때 앞으로 엎어질 염려가 없고, 따라서 뒤로 몸을 젖힐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체중이나 태아의 크기가 침팬지와 크기가 비슷했던 최초의 직립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뼈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 요추는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며 위와 같이 최적화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직립 인류가 나타나며 요추의 구조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임신부의 허리 통증 해결은 굉장히 중요한 생존 요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이 가지고 있는 쐐기 모양 척추뼈는 허리가 많이 아픈 임신부들이 포식자로부터 탈출하거나, 음식을 구하는 등 생존활동이 쉽지 않아 후손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현재 우리 같은 척추를 가진 개체는 생존해낸 거죠.
아직까지도 인간은 임신부 요통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진화한 척추뼈 덕분에 조금은 덜한 거라고 위로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자료>
-Whitcome, Katherine K., Liza J. Shapiro, and Daniel E. Lieberman. "Fetal load and the evolution of lumbar lordosis in bipedal hominins." Nature 450.7172 (2007): 1075.
-Youtube: The 19th First Annual Ig Nobel Prize Ceremo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