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
끈氣. 끈끈한, 기운 기.
단단하게도, 질기게도 붙어 있는 기운. 손으로 떼어내려 해도 손끝에 남고, 마음에서 지우려 해도 자꾸 다시 나타나는 어떤 마음. 나는 이 두 글자가 마치 사람의 성질처럼 느껴졌다. 의욕 하나로 버티고, 미련하다고 욕먹으면서도 계속하는 사람. 그게 나였던 적이 있다. 내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밤엔 납기 걱정, 아침엔 고객 응대, 밥 먹다가도 자재 수급과 납품 일정 생각. 생각에 잠겨있을 때는 누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낮밤이 구분 없던 시절.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다시 앉아 컴퓨터를 켰다. 왜냐면 벌리니까. 돈이.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얘기인데, 돈은 나에게 엄청난 동기였다. 삶을 미치게 소진시켰어도 결과가 있으니 가능한 끈기였다. 그러니까, 나도 끈기 있는 사람이긴 한 거다.
그런 내가 끈기 있게 하지 못하고 포기한 것도 있다. 스물일곱 살 즈음, KBS 공채 개그맨 시험을 준비했다. KBS 방송예술원을 다닐 때 캐릭터가 꽤나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고, 공채 시험을 봤다. 함께 준비하던 동기 10명 중 1명은 공채에 합격했고, 떨어진 9명은 대학로 극단 ‘갈갈이’에 들어갈 기회를 받았다. 당시 난 그걸 거절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미래가 안 보이는 무대였다. 불안했고, 체력이 달렸고, 또 떨어질까 봐 겁났다. 그 선택은 지금도 아쉽다. TV에 나오는 그 시절 동기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자리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후회도 된다. 그리고 가끔은 궁금하다. “내가 그 지평선 너머로 끝까지 가봤다면 어땠을까?”
끈기와 고집은 한 끗 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과정이 긍정적이고 나를 살게 하면 끈기, 주변을 피곤하게 만들고 나조차 병들게 하면 고집. 그래서 나는 요즘 이런 태도를 연습 중이다. 주변을 눈치 주지 않고, 스스로 조바심 내지 않고, 조금은 가볍게 계속하는 자세. 오래 붙들고 있으면서도 지치지 않기 위해선, 마음도 자세도 유연해야 한다.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안 돼도 계속하는 건 어리석은 거야.” 또 누구는 “포기하지 않는 게 진짜 힘이야”라고 말한다. 둘 다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래서 중요한 건 그 과정 속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느냐다. 억지로 웃고 있다면 어리석음이고, 묵묵히 단단하다면 끈기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용기도 끈기다. 끈기는 '계속함'이 아니라 '지속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자세'다. 세상 눈치를 보지 않고, 나 자신을 눈치 주지도 않고, 그저 내 템포대로 묵묵히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시작할 때의 기대와 포부는 대차지만, 계획을 끈질기게 밀고 가야 할 일상이 되면 꼭 한 번씩 불안과 허무가 치고 들어온다. 그 허무가 크게 밀려와 때릴 때면, 미래는 없을 것만 같고, 지금의 내가 틀린 선택을 한 것 같고,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는 되뇌이며 지속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는다. 끈덕지게 붙어있는 기운. 그냥 버티는 것도 재능이다.
끈氣. 이 한자는 멋지게 포장된 정신력이라기보다, 땀 냄새나는 꾸준함에 가깝다. 비장하지 않다. 그저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마음.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면 몰라도, 싫은 일을 붙잡고 있는 나 자신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붙잡고 있는 사이에 나도 조금씩 변할 수 있다면, 그건 의미 있다. 그게 바로 ‘끈氣’의 기운일 테니까. 지금도 나는 매일 고민한다. 뭘 계속 붙잡을지, 뭘 놓을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고민조차 끈기의 일부라는 걸. 완주 못해도 괜찮다. 완주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면, 그건 다음에 이어갈 수 있다는 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