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김연아 선수가 현역으로 있던 시절, 맹연습하는 것을 본 누군가 그녀에게 "무슨 생각하면서 연습해?"라고 묻자 그렇게 말했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말이다. 요즘 그 말이 자꾸 떠오른다. 예전엔 뭐든 머릿속으로 몇 번씩 씹고 곱씹었다.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가능할까 아닐까. 그러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에게 허락받지 못한 무언가처럼 서성이다가 시간이 지나버렸고,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이 됐다. 머뭇거렸지만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고민과 소심한 실행을 한 결과로 나름 잘 살고 있다.
지금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시대다. 수십만 원짜리 강의를 들어도, 수천 명의 후기를 읽어도, 백 번의 모의계획을 짜도,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계획보다 무질서보다 더 위험한 건 과도한 예측일 수도 있다. 요즘 세상은 그렇다. 누구도 몰라서, 그러니까 오히려 하던 대로 쭉 하는 수밖에 없다. 멈추는 것보다 나아가는 게 낫고, 애쓰는 척이라도 하는 게 나중에 나 자신에게 떳떳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줄어든다. 위로랍시고 해줄 수 있는 말은 뻔하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줘”, “너 잘하고 있어.” 그런데 솔직히 그런 말들이 내겐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내게 해주는 말은 이거 하나다. “그냥 하자.” 뭘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달콤했던 여름휴가가 끝났다. 아이들과의 시간이 내 삶을 얼마나 환기시켜 주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웃는 얼굴, 물장난, 간식 먹을 때의 잔망스러운 손짓. 나라는 사람은 사라지고 그들만 보였다. 그런데 다시 일상이다. 다시 일, 다시 돈, 다시 책임. 복귀하기가 무척 두렵다. 솔직히 말하면 이불 안에서 한참을 우물거리며, '가기 싫다'를 열다섯 번은 중얼거렸다. 책상 앞에 앉는 일이 이렇게 거북하던 때가 또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곧, 이 마음도 물처럼 흘러가 버릴 것을 안다. 그렇게 흘러가고 지나가고 버려지고 잊히기를 반복하는 게 나라는 존재라는 것도. 그러니 오늘도 그렇게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매일을 잘 살려는 게 아니라, 그저 버티는 거. 오늘도 적당히 무감하고, 적당히 의무감 있고, 적당히 무거운 눈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적당히 나를 잊고.’
내 생각은 오늘도 멀리 밀어둔다. 나를 괴롭히는 질문들(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는 걸까, 나라는 사람은 뭘 위해 사는 걸까)그 모든 생각들을 접어두고 그저 움직인다. 우선은 돈을 벌어야 한다. 예쁜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 웃음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불빛일 때가 많다. 아이들의 기분 좋은 숨소리만큼은 지켜야 하니까.
어쩌면 삶이란 건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내가 뭘 위해 사는가”를 묻는 대신,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오늘도 움직이는가”를 묻는 것. 질문을 바꾸면 삶의 방향도 조금은 선명해진다.
그냥 하자. 이유는 나중에 붙여도 된다. 시작은 언제나 가볍고 무모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간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오늘도 그냥 해보자. 말없이, 생각 없이. 그렇게 하루하루 이어 붙인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날엔, 그런 ‘그냥 한 날들’이 내 인생의 가장 단단한 시절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