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개안

내가 나를 데리고 걷는 오늘

by 이손끝

현실은 자주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 하나 뚜렷이 보이지 않고,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마음이 조심스러워진다. 혹시 지금 이 길 끝에 낭떠러지가 있으면 어쩌지. 아니, 어쩌면 그 아래엔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금광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나는 안갯속을 걷는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안개는 이상하게도 익숙하다. 어릴 적엔 나를 감추기 위한 방편처럼 느껴졌고, 스무 살 무렵엔 세상이 날 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 같았다. 지금은 안개가 더는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것 덕분에 내가 나를 더 잘 보게 되니까.


안개는 흐릿하지만, 그 안에서는 감각이 살아난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껴야 하니까. 예민하게, 신중하게, 그리고 본능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나는 내 안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끌림을 따른다. 좋아서 자꾸 손이 가는 것, 이상하게 오래 머물게 되는 자리, 내 눈이 자꾸 머무는 장면들. 그런 것들 속에 내가 지금 가야 할 방향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안개’를 거꾸로 뒤집으면 ‘개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금 웃겼다. 단어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니.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통찰, 흐리던 시야가 환하게 트이는 순간. 개안이란 말에는 그런 놀라움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안개를 걷다 보면 반드시 ‘개안’의 순간이 온다고. 그것은 드라마틱하게 눈앞이 확 트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아주 미세한 감각 하나가 정돈되는 느낌일 것이다. ‘아, 이래서 내가 이 길을 왔구나’ 하고 문득 납득하게 되는. 마치 잃어버린 조각을 제자리에 딱 맞춰 넣었을 때처럼.


10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내 손에 어떤 일이 들려 있을지,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을지, 어떤 문장을 쓰게 될지.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안쓰럽고도 기특하다. 그렇게 흔들리고 방황하면서도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그 어리고도 단단한 내가 있었다. 누구도 길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통과했고, 결국 이 자리까지 왔다. 그 시절의 나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다. “안갯속을 그렇게 걸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어.” 의미 없는 날은 하나도 없었다고, 네가 흘렸던 눈물과 망설임은 지금 나에게 명확한 근거가 되었다고.


그렇다면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나는 궁금하다. 매일 치열하게 쌓아 올리는 이 노력의 의미를, 그때의 나는 어떤 시선으로 되돌아볼까. 지금은 고작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의 나는 그 시간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줄까. 축적, 성실, 기적, 전환점, 아니면 아무도 몰랐던 비밀 같은 시간. 내 감각과 끌림을 따라 걷는 이 길이 언젠가는 말이 될까. 지금은 말이 되지 않지만, 언젠가는 말이 되리라 믿는다.


나는 오늘도 안개 속을 걷는다. 때론 지치고, 때론 멈추고 싶지만 그래도 걷는다. 내가 나를 데리고 걷는다. 안개가 걷히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되어서 지금의 나를 꼭 안아줄 것이다. “잘 왔다고. 멈추지 않아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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