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기운을 닮아 간다.

기운(氣運)

by 이손끝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려 하면 먼저 실패했을 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안 되면 어쩌지, 그다음은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는 늘 플랜 1, 2, 3, 4가 준비되어 있다.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해 두어야 마음이 조금 놓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성실한 대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을,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으로 먼저 소진하고 있는 셈이다.


내 남편은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늘 말했다. “잘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말이 그의 기본값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되물었다. “당신은 맨날 뭐가 잘된다는 거야? 어떻게 잘된다는 건데?” 막연한 낙관은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대안을 요구했다. 명확한 계획과 논리가 있어야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가슴 아픈 장면을 보았다. 남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되면 어쩌지......” 순간 나는 나까지 걱정을 하면 우리를 짓누를 불행의 기운에 잠식될 것 같아 나답지 않게 말했다. “잘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자.” 말을 하고 나서 문득 깨달았다.


저 말은 늘 그가 나에게 해주던 말이었다. 언제나 긍정적이던 사람이 어느새 걱정을 입에 올리고 있었고,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 내 걱정이 서서히 그의 긍정을 무너뜨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의 신혼 시절 영상이 나왔다. 윤종신이 말하길, 머리가 복잡할 때 그들의 집에 가면 늘 행복해 보이는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반겨주었다고 했다. 걱정 없는 얼굴로 웃고 떠드는 두 사람.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단단하게 자리 잡은 부부가 되었다. 그들의 삶이 항상 가벼웠을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의 기운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운’이라는 말은 한자로 氣運이라고 쓴다.
氣(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숨결 같은 힘이고,
運(운)은 흐르고 돌아가는 길, 곧 운명과 흐름을 뜻한다.


그러니까 기운이란 결국 사람에게서 나와 삶의 방향을 만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흐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생각보다 서로의 기운을 많이 닮아 간다. 누군가의 불안은 조용히 옆 사람에게 옮겨 붙고, 누군가의 낙관은 또 다른 사람의 어깨를 조금 가볍게 만든다. 내가 매일 꺼내던 걱정이 우리 집의 공기가 되었고, 그 공기를 가장 오래 마신 사람이 남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세상에는 걱정할 이유가 많다는 것도, 인생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 사실을 매일 입 밖으로 꺼내며 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요즘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려 한다. 틀릴 수도 있지만, 걱정을 덜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보는 것. 내가 내보내는 氣가 조금 더 가벼워지면, 우리 삶의 運도 조금은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어서다.


어쩌면 인생은 결국 우리가 내보내는 기운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긍정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기운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걱정으로 가득했던 어제보다 웃으며 보냈던 어제를 더 기억하고 싶을 테니까.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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