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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에 사는 은미

by 소운

우리 옆집에는 은미가 살았다. 은미는 지적 장애인이었고 말을 자주 느리게 얼버무렸다. 나는 은미를 좋아했다. 은미의 시선은 순수하고 누구보다 맑았고 은미가 말을 천천히 할수록 나는 밖에서 오래 놀 수 있었다. 작고 마른 은미는 항상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은미를 놀리는 남자애에게 맞섰다가 발차기를 당하기도 했었다. 아프다고 우는 대신 나를 찬 그 발을 잡고 고추를 차버렸다. 누군가를 지켜줬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종종 여자애들을 지켜줬다. 피부가 어두운 은정이를 ‘아프리카’라고 놀리는 남자애에게 “니는 눈이 찢어졌으니까 새우깡이가?”라고 했다가 뺨을 7대나 맞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김승우의 얼굴에 각진 종이 필통을 던졌다. 김승우의 손찌검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빠가 학교에 올 걸 알았으니까. 우리 아빠는 교실에 오자마자 그 남자애를 번쩍 들어서 사물함에 던져버렸다. “이 새끼야, 니 어디서 내 딸한테 손대노? 니가 남자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 애 뺨을 똑같이 때리려고 했다. 말리지 않았다. 아빠가 저 남자애를 죽여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을 잡고 집에 가는 길에 아빠는 여러 번 걷다가 멈춰 서서 빨개진 내 볼을 만져줬다. “니 안 울고 기특하네.”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울면 그 쪼다새끼가 내를 지보다 약하다고 생각할 거 아니가." 아빠는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내 딸내미 어디 가서 무시당하고 살진 않겠다고 말하면서.

아빠 덕분인지 지금도 무례한 남자들을 보면 참지 않는다. 그저 우습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키가 나만 한 남자애가 내 친구가 가슴이 크다는 이유로 매일 모욕적인 말로 성희롱을 했다. 이름은 이정현. 참고 또 참았다.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었으니까. 새아빠에겐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겐 달려와 줄 '헌' 아빠가 없었다. 몇 번을 더 참다 보니 내 친구는 갑자기 방황하기 시작했다. 화장이 진해졌고 눈이 자주 부어있었다. 이정현이 "야, 니도 니 가슴 큰 거 알지? 미친년."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주변을 둘러봤다. 나처럼 모른 척하는 반 친구들과 그 말에 주눅이 든 내 친구.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정현의 뒤통수에 대고 “야, 우리가 언제 니 키 작다고 말한 적 있나? 가슴 큰데 어쩌라고? 니 부모님은 집에서 안 가르치더나?”라고 사투리로 말했다. 사투리는 내게 큰 힘을 줬다. 서울에 온 이후 4년 동안 서울 남자아이들이 내 거친 사투리 억양에 주눅 드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이정현이 일어났다. “너 미쳤냐?”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만 한 키에 나긋한 서울말을 쓰는 이정현이 우스웠다. “왜? 니가 남한테 하는 말은 괜찮고 내가 니한테 하는 말은 안 되나?”라고 했더니 내 발밑으로 의자를 던졌다. “쪽팔린 줄 알아라. 할 줄 아는 게 물건 던지고, 욕하고, 성희롱 밖에 없제? 얘네도 다 니 우습다고 생각한다. 키도 작은 게 주제도 모르고 깝죽거린다고 생각할걸. 근데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알겠나. 왜? 더 던져봐라.”라고 했고 다행히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담임이 왔다. 담임은 부모님을 부르지 않았다. 이정현은 나에게 더 이상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내 친구에게도 더 이상 모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애는 더 이상 가출을 하지 않았다.

가끔 김승우와 이정현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전히 참지 않는 이유는 아빠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언제든 찾아와서 나를 그렇게 대한 사람을 다 말린 명태포를 패듯 가차 없이 패줄 수 있는 ‘그’ 아빠가 있어서. 내가 도와준 친구들이 십여 년이 지나서도 무한한 SNS에서 나를 찾아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기 때문에. 그저께 이후로 잊고 지낸 아빠의 모습과 맑은 은미가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출발 전에 뭐라도 남겨놓고 싶었다. 요즘 세상에 남의 집 초인종을 함부로 누르면 안 되는데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초인종 소리에 밖으로 나온 집주인에게 ”실례합니다. 혹시 은미라는 친구 아직도 사나요?“라고 물었더니, 십 년 전에 크게 아파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어디가 아팠을까. 공항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났다. 십일 년 전에 올걸 그랬다며 연신 혼잣말했다. 내리는 비마저 같이 웅얼거리는 듯했다.

이제 비행기가 뜬다. 내 모든 묵은 마음을 이 동네에 묻어놓고 간다. 은미야, 네가 장은미인지 이은미인지 이제는 까마득해. 부산에 올 때마다 네 생각을 줄곧 했었어. 어떻게 지내니? 네가 나를 좋아한 것처럼 나도 너를 참 좋아했어. 건강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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