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llalawoman Dec 30. 2021

김밥을 좋아합니다만

새벽 6시. 가족들의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시계를 보는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다.

전날 미리 당근을 썰어 넣고, 다진 소고기도 재워 놓고, 재료들도 미리 준비해놓았지만, 제한 시간이 있는 아침에는 언제나 마음이 바쁘다.


한국에 살고 있다면 훨씬 맛있는 김밥을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닌 요르단이다. 내가 직접 만들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한인이 많은 나라와 도시들은 한인 식당, 한인 슈퍼도 있지만 요르단에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운영하는 한인식당 2~3곳뿐이다. 미리 예약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곳이어서 접근이 쉽지 않다.


나는 어릴 때부터 김밥을 좋아했다. 지금도 김밥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식탁 위에 엄마가 만들어 주신 김밥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면 신나서 환호했다. 회사 일이 바빠 식사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 입안 가득 김밥을 밀어 넣으며 일했지만, 김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루 세끼 내내 김밥을 먹어도 지겹지 않았다. 늘 가까이에 있고, 먹고 싶을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김밥이었다.

온갖 종류의 김밥을 섭렵해가면서, 김밥과 함께한 시간이 어언 30년은 될 것이다.

김밥이 많은 수고가 깃든 음식이라는 것을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먹을 때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준비할 재료도 많고 재료마다 따로 조리해야 하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김밥을 싸는 날이면 넉넉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준비한다.

맛있게 먹는 식구들을 보면 뿌듯하다. 맛있게 먹는 표정과 와그작와그작 음식 씹는 소리를 들으면 먹방이 왜 인기가 많은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아드레날린이 솟는 기분이다.

이 맛에 고된 수고도 감수하고 열심히 음식을 만든다.

모두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시간이 되면 후련하기도 하면서 헛헛해지기도 한다.


정작 내가 먹을 김밥은 남아있지 않아서이다.

왜 일까? 넉넉히 만들었는데 왜 내가 먹을 수 있는 김밥은 남아있지 않을까?

'내 손이 작아서, 넉넉히 못 만드나?' '도시락에 김밥을 너무 많이 싸줬나?'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항상 김밥 꼬다리만 입에 물고 있다.


어느 날, 이런 내가 너무 처량했다.

가족들에게는 김밥이 자주 먹는 음식이어서 특별하지 않겠지만, 정작 만드는 나는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이어서 늘 서럽다.

재료가 넉넉하지 않은 날은 더 많이 준비하지 않은 것을 탓하고, 분명 넉넉히 준비한 날은 김밥 한 줄 남겨두지 못한 미련함을 탓한다.

'나도 김밥 좋아하는데... 누가 내 김밥 좀 만들어주면 좋겠네...'


아마도 식구들은 내가 김밥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김밥을 좋아한다는 것을 과연 알고 있을까?

열심히 만든 김밥을 정작 나는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오늘만큼은 꼭 나도 김밥을 먹고 말 것이다

정말, 작정하고 재료를 넉넉히 만들어 두었으니 말이다.

식구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나를 위해 만들 것이다.

온갖 재료들을 모두 넣어, 아주 빵빵하게 두툼하게 아주 맛있게 말이다.

나도 김밥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단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에는 해리포터 덕후가 살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