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이 삶에 적응이 될는지

by rallalawoman

아침에 눈을 뜨니 딱딱하게 굳은 근육들이 어제와 또 다름을 느낀다.

오늘은 목이 뻐근하고, 어제는 어깨가 저릿했고, 그제는 허리에 얇은 신경하나가 곤두선 듯, 아슬아슬한 통증의 경계에 있음을 느낀다.

눈을 떴을 때 상쾌한 아침이라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몸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몇 해 전 위통과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았었다.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위가 조이는 통증이 가끔씩 있었는데 한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위의 움직임이 너무 적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체질이라며 위뿐만 아니라 신체의 근육들이 경직되어 있다고 침과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유독 긴장을 많이 하고, 주위의 환경에 민감한 편이다. 평소 ’ 긴장을 풀어라, 몸의 힘을 빼라 ‘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아왔다. 말의 의미는 잘 알겠으나, 문제는 몸의 힘을 뺀다고 빼는데 실제로는 ‘몸의 힘을 뺀다는 것’이 어떤 감각의 상태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물리치료사님이 “자, 환자분 몸의 힘을 빼세요.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시고...... 힘을 빼세요, 안 그러면 근육이 다칩니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세요”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코로 마신 공기를 최대한 가슴을 부풀리면서.

하지만, 물리치료사님은 “호흡하는 것부터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호흡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내가 지금까지 숨 쉬고 살아왔는데? 나는 지금까지 숨 쉬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며 살았다는 건가?’


호흡을 하라고 할 때면 언제나 코로 들이마시고, 가슴 윗부분을 한껏 들어 올리고 내뱉었다. 하지만, 긴장을 푸는 호흡은 숨을 들이마시고 배를 부풀려야 하는 것이었다. 공기가 서서히 몸속으로 들어가면서 아주 깊게 배꼽 밑까지 밀어내듯이 들이마시고 내뱉어야 하는 것이었다. 배를 부풀리며 숨을 들이마시는 일은 내게 아주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었다. 이제껏 내가 이해한 숨쉬기는 아주 짧은 호흡이었던 탓이다. 호흡이 짧으니 나는 어떤 활동에도 쉽게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십여 분동 안 열심히 이야기하고 나면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힘이 빠져 목의 안쪽 근육이 뻐근해져 왔다. 깊은숨을 쉬는 방법을 이해하고 다시 숨을 쉬었을 때는 머릿속 안개가 뒤통수로 밀려나면서 눈이 개운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호흡을 깊게 하고 나니 목소리가 편안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숨 쉬는 방법을 잘 몰랐고, 내 몸을 쓰는 법을 몰랐다.

“호흡하는 것부터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은 들은 순간, 내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과 태도에 대해 의문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나는 숨 쉬는 법을 알고 있는가? 내 몸의 상태를 이해하고 있는가? 내 수많은 통증들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나는 왜 긴장을 하며 살고 있는가? 그 긴장을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마치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의 근원적 질문을 하는 것과 같았다.


사십여 년을 매일 아침 새롭게 눈을 뜨며 살아왔다. 오늘까지 대략 15,300여 일.

나를 스스로 인식하기 어려웠던 유아기 시절을 제외하면 기억의 끝에서 시작된다 가정했을 때, 13,879일. 이토록 많은 새로운 아침을 맞이해 오면서,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악몽 속에서 ‘제발 눈을 떠!’를 외치면 일어난 날도, ‘아니야, 이건 아니야’하며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울다 깨어난 날도,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에 깨어난 날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끝내 일으켜 세우던 날도, 아침이 와서 다행이라며 눈을 뜬 날. 모든 날이 다른 아침이었다.


이제는 가벼운 몸 상태의 아침이 무엇인지 잊어가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오늘은 어깨가 아프구나..’ ‘무릎은 왜 아픈 거지?’ 뒷목과 등으로 이어지는 통증이 심해 눕는 것이 고통스럽던 날들은 고단하고 비참하던 육신을 끌어안고 ‘이 몸뚱이를 버리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되뇌었었다.


십 대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확실함으로, 이십 대에는 새벽까지 일하거나 혹은 새벽부터 일해야 하는 날들로, 삼십 대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땅에서 어린 딸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와 불안감으로 인생이 하루도 이완되는 날이 없었다. 나약한 자아를 어떻게든 붙들어 보겠다며 자는 순간에도 이를 꽉 물며 자는 버릇이 생겨 턱관절마저 상해버렸었다.


내 몸은 두려움에 나약해지는 자신을 있는 힘껏 버텨낸 화석이었다.

몸 곳곳이 고장 나고 있음을 목격해야 했던 날들은 ‘언제까지 이 아픈 몸뚱이를 갖고 살아야 하나’ 싶어 앞이 까마득하고 버거워 꺼이꺼이 그렇게 혼자 울었다.


어쩌다 아픔을 느끼지 않고 눈을 뜨게 되는 날에는 저절로 ’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새어 나왔다.

어제까지 나를 좌절하게 만들던 고통 속에서 벗어난 순간, 통증이 없다는 감각이 벅차게 행복한 날도 있었다. 그 통증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간절함 마음으로 또 눈을 감았다.


익숙함이라는 감각이 나는 아직도 생경하다. 여러 언어의 혼재하는 공간에서 나는 그 어떤 언어도 익숙하지 않으며, 조각난 언어로 살고 있는 나의 세계는 낯섦 그 자체이다. 오늘의 몸 상태 또한 익숙하지 않고,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이방인이라는 사실 또한 십여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함이라는 상태에 도달한 어떤 이들의 삶을 감탄한다. 그러한 상태에 있는 이들의 수많은 시간들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편안함이라는 것은 늘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분명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미지의 세계다. 내 호흡을 잘 다스리게 되면, 그때는 편안함이라는 상태를 느껴볼 수 있을까? 몸의 힘을 충분히 빼고, 모든 근육이 이완되어 축 늘어져있음이 불편하지 않은 상태가 될 때까지 연습하면 가능할까?

수많은 날들이 같지 않았다. 모든 순간은 예측 불가능하다. 어제와 오늘은 다르고 오늘과 내일 또한 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삶이라는 것에 나는 아직도 적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마지막 숨을 코끝으로 내뱉는 순간까지도 끝내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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