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는 여성에게 유독 가혹했던 억압과 폭력의 문화로부터 저항한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이야기이다. 하와이로 이주한 가난한 아시아 여성은 우연히 만난 남성으로부터 '교육의 기회'라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고 수락한다. 그러나 그는 폭력의 그늘 아래 여성을 가둔다. 그는 차별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유럽계 남성이자 예술계의 거장으로서 막대한 권력을 가진 자였다. 그에게서 도망친 여성은 고국으로 돌아와 말과 글로써 남성 중심 문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가해자는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보복을 한다. 그로 인해 여성은 세상으로부터 또 다른 가해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대항하며 '비틀린 데 없는' 예술가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소설 속 인물은 당당하고 호쾌하게 험난한 삶을 받아들였지만 매 순간이 투쟁이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이 작용하는 예술계에서 버텼을 여성 예술가들, 예술계뿐 아니라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지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가족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된다. 여성을 중심으로 그려진 가계도에서부터 신선함이 느껴졌고,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성(姓)은 남성 중심 문화를 해체한다. 주도적인 딸 '명혜', 엄마의 성을 따른 '명은', 친딸이 아니지만 구김 없이 자란 '경아'와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편견이 없는 '지수' 등은 기존의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의 범주를 넘어선다. 반면에 폭력 피해를 당한 '화수'와 폭력을 방관하여 친구를 지키지 못한 '규림', 가족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명준' 등은 여전히 갈등과 고민을 갖고 있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사란 여성들을 배제한 채 여성들의 노동을 취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가 죽은 지 10년 차에 가족들이 특별한 제사를 지내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가족들은 그가 한때 머물렀던 하와이에서 저마다 의미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제국주의로 인해 아픔을 겪은 장소인 하와이를 알아가면서 시선의 가족들은 폭력의 영향력을 실감하는 동시에 폭력에 저항했던 한 사람이 남긴 유산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시선으로부터,》는 길고 어두운 차별과 폭력의 역사에 저항하는 삶을 쾌활하게 그려낸다. 고통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시도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절망하지 않고 건강한 삶을 꿈꾸도록 힘을 준다. 제목 끝에 붙은 쉼표에는 많은 의미가 담긴 듯하다. 기울어진 문화를 바로잡는 것, 폭력에 대항해 자신을 지키는 법, 살아남고 살아가는 법, 표현하는 법, 존중하는 법... 소설 속 인물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얼마만큼 변화해갈지, 이제 지면을 넘어 이어질 우리들의 서사를 기대해 본다.
책 정보 :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글, 문학동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