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May 30. 2022

대기 번호 777을 닮은 하루

문장과 세계 #10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에 가는 길, 한창 일할 시간에 밖에 나익숙한 풍경도 조금은 낯설고 아름답게 보인다. 해 초부터 무리해서였는지, 현기증 진단을 받은 뒤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잔 어지러움 증세와 핑 돌려다 마는 현상이 남아 있는 상태다. 현기증을 겪어 보니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새삼 다.




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혼자일 때는 늘 책을 보생각에 빠져서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잘 알아보지 못다. 친구와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친구만 보고 있는데, 친구는 옆 테이블 커플이 싸우고 있다며 눈자를 굴리고 귀를 있는 대로 늘려 듣곤 했다.


글을 쓰면서부터는 나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다. 소설이 아닌 내 이야기만 쓰고 있는데도 타인들에게 관심이 생기려는 참이다. 마침 대기 환자가 많아 진료까지는 얼마간 기다려야 했는데, 사람들이 지나면서 나누는 말들이 내 귀에 전달된다. 그래서 책을 꺼내는 대신 토막 난 대화들을 수집해 보았다.



먼저 복작복작대는 간호사무실 앞 두 사람의 대화. 중년의 환자분께서 ‘이러면 내가 손해’라고 불평을 하고 있다. 이에 간호사 선생님은 약간 예민해지면서, “제가 손해 보게 해 드린 건 아니잖아요”라고 반박한다. 무슨 일일까, 일정이 꼬였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아픔 앞에서 여유로울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쪽은 아파서, 다른 사람은 아픈 사람을 대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테니, 그래서 예민해지는 거라고.




내 앞에는 아빠와 딸이 문진표를 작성하고 있다. 딸이 아빠에게, 또 대로 판단한다면서 자가진단 하지 마시라고 핀잔을 한다. 이어지는 반응으로는 아빠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내가 또 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말이 오가겠지, 하며 약간 긴장을 했다. 그런데 아빠 되시는 분은 “그래, 내가 또 자가진단을 잘하지, 허허”라고 웃으시는 것이 아닌가. 인정하는 사람은 좋아할 수밖에 없다. 부녀 덕에 나도 뻗대지 않고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한다.



다음으로 들려온 대화는 환자를 휠체어에 태우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시는 보호자님의 말씀이었다. 다정한 말투로 “다니니까 좀 낫지?” 하고 환자에게 묻는다. 내가 못 들은 건지 환자분은 말이 없다. 그러자 다시 “하기 싫어?”라는 물음. 역시나 답은 없었지만 보호자님의 세심함에 환자분도 그리 싫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을 해 본다.




이어 나의 진료가 시작되었고 약을 2주 더 먹어 보고 3개월 후 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검사 예약 시간은 오후 두 시로 확정되어 내게 전달되었다. 그 시간이면 오후 반차로도 애매한 시간이라 세 시는 어떠냐고 물으니 그 시간에는 어렵단다. 빠르게 포기한 내가 “그럼 연차를 내고 올게요” 했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눈썹을 오므리며 그래도 괜찮겠냐고 다정히 묻고, 네 시 반도 가능하니 조정해 준다고 한다. 소중한 반차를 지켜준 간호사님의 눈썹이 좋았다.



접수번호순으로 처리하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납과 예약을 하기 위해 접수처로 옮겼다. 와글와글한 분위기에 대기인이 스물 셋이나 된다. 책을 읽기에도 산만한 상황이었지만 접수번호가 777인 것이 왠지 나쁘지 않다. 바쁜 일도 없으니 천천히 기다려 보기로 하고 두 권의 책을 꺼낸다. 가방은 무거웠지만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순간도 좋다. 그 때 뒷편에서 “화장실이 어디 있는가?”라는 부부의 대화가 들려왔고 나도 함께 두리번거렸는데, 다행히 나보다 먼저 찾으셨는지 자리를 뜨신다.




2차 병원이어서 환자도 직원도 많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구급차를 정비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삶의 위기와, 누군가의 마지막 흔적을 닦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다른 이의 위기를 기다리는 일, 그리고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도 출산 때 구급차를 타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생명을 싣고 달리는 그들에게 고마움이 느껴.



이 날 보았던 장면들과 채집한 단어들을 그러모아 또 한 편의 글에 꼭꼭 담아 본다. 전날보다 갑작스레 날씨가 더워졌고 대기 시간도 길었지만 나쁘지 않은 하루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생각보다 좋았다. 대기표에 영혼 없이 적혀 있던 “대단히 감사합니다”라는 문장도 오늘은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오늘은 제법, 아니 대단히 괜찮은 날이니까.





Photo : 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의 터부와 금지된 장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