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May 24. 2022

할머니의 터부와 금지된 장난

문장과 세계 #9


아이들은 금지된 군것질감에 이를 수 있는 온갖 틈새기나 구멍들을 찾아내는 데 온 정신을 다 쏟고, 남모르는 짜릿한 두려움을 지닌 채 그것을 먹곤 하죠. 그런 두려움이야말로 어린 시절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상당히 큰 부분이죠.

-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중에서


괴테가 쓴, 어린 시절의 행복에 관한 글을 읽다 보니 보니 또 할머니가 생각난다. 우리 할머니에게는 몇 가지 금기가 있었는데, 우리 삼 남매는 금기를 깨고 장난쳐가면서 조금씩 성장해온 듯하다.




나는 제사 음식에 대한 관대함으로 옛날 할머니와 신식 할머니를 구분했다. 우리 할머니는 제사 음식만큼은 미리 먹지 못하게 했는데 엄마와 공범이 되어 몰래 먹는 전이 참 맛있었다. 하지만 제사가 끝나고 나면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맛나다면서 우리들의 배를 부풀도록 채워 주셨다. 할머니의 제사상 대표 음식은 꼬막전이었다. 할머니 말고는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레시피, 그 맛이 그립다.



혹시 열쇠 하나가
자물쇠에 그대로 꽂혀 있기라도 하면...


이 문장에서는 할머니의 오래된 자개장이 떠올랐다. 네모지고 양 옆이 뚫린 자물쇠 오른쪽에 쇳대를 찔러 넣는 구조였다. 그게 잠겨 있으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나 궁금하여 이불 밑에 있던 쇳대를 찾아 몰래 열어보곤 했는데, 사실 그 안에는 오래된 옷들 뿐이었다. 게다가 묵직해 보였던 자물쇠쇠붙이 사이가 벌어져 있다가 네모 구멍을 찔러 넣으면 모아지며 열리는 단순한 구조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놀이의 재미가 시들해졌다.



할머니는 또 ‘원숭이’라는 단어를 쓰면 그날 일진이 사나워진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들과 내가 ‘원숭이’라고 말하면 꼭 ‘잔나비’라고 고쳐서 말씀하셨는데, 이유를 물어보면 그 말을 자꾸 써야 해서 말 못한다시며,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게 너무 이상하고 재미있어서 일부러 자꾸 말했다. 할머니는 타이르고 화를 내시다가도, 우리들의 웃음에 전염되어 함께 웃으시며 화난 표정 짓는 것에 실패하곤 하셨다.




외출복에 뭐가 묻어서 살짝 빨아 입을라 치면, 할머니는 젖은 옷을 입으면 누명을 쓴다고 말리셨다. 나는 그런 게 어딨냐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신다고만 생각했다. 할머니가 떠나신 후에야 밖에서 내 손자가 괜한 말을 들을까 걱정하셨을 마음이 생각났고, 비로소 젖은 옷이 누명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사람을 모욕할 때 뿌리는 물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사극에서 정신을 잃은 죄인에게 물을 붓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다. 찾아보니 일본어에서 ‘누명을 쓰다’라는 관용어를 직역하면 ‘젖은 옷을 입다’여서 그런 금기가 유래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사용하는 말에는 일본말이 많았다. 바지는 쓰봉이었고, 방석은 자부동이었다. 할머니가 살아오신 세월이 할머니의 언어에 묻어다. 그 말투가 새록새록하다.





이제 나는 제사를 지낼 일도 없고, 자물쇠나 열쇠도 도어록으로 바뀌고 있으며 일본말의 잔재도 우리말로 대체되고 있다. 그래도 빨래를 널 때나 전을 부쳐 먹을 때, 마지막 선물로 남겨 주신 냄비를 사용할 때 할머니를 떠올린다. 여러 이유로 아직은 건조기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빨래마저 기계가 대체한다면 할머니의 기억은 더 어질지 모르겠다. 이제는 하나둘씩 사라지는 물건들보다는 할머니추억을 담은 글로 떠올려야 할 것 같다.




Photo : 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의 집과 빨간 냄비와 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