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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y 13. 2022

할머니의 집과 빨간 냄비와 귤

문장과 세계 #8


 사랑은 참 이상해.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만 살았다. 방 네 개, 부엌 두 개마루가 딸린 한옥집. 어릴 땐, 정확히 대칭인 그 집의 반을 갈라 세를 주고 남은 공간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다. 작은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더듬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안방엔 문이 네 개였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과 다락방 문, 뒤꼍으로  문 그리고 마루로 나가는 방문. 마루 오른편 작은 방 할머니와 나, 여동생이 쓰던 방이었다.



방 두 개를 쓰던 무렵 마루 밖은 시멘트 마당이었다. 전면에 장독대와 수돗가, 화장실이 있었고 창고와 작은 화단이 두 개씩이었다. 앙상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여름이면 대문에 지붕을 만들어줬다. 그 작은 공간에 있을 게 다 있었다. 너무 갖고 싶던 옥상만 빼고. 우리 남매가 자라면서 세를 빼고 마당을 없앤 뒤 단층 양옥으로 개조를 했다. 옥상이 생겼지만 그땐 이미 관심이 떠난 후여서 다른 집으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이사를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그 집은 증조할머니가 구매하신 집이라고 했다. 증조할머니의 외아들은 부인과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전쟁 때 일본으로 건너가 새 가정을 꾸렸다. 물려줄 아들이 없으니 집은 혼자된 며느리,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에게 남겨졌다. 싫을 법도 하건만 할머니는 절대 그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집을 고치고 고쳐가며 살았다.



집을 떠나지 못한 그 마음은 그리움일까, 애틋함일까 아니면 원망 섞인 고집이었을까. 십 년에 한 번쯤 일본 가족들 몰래 연락이 닿던 할아버지가 찾아오지 못할까 봐 그러셨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아닌 아들하고만 연락을 하셨는데.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내가 그런 마음들을 들여다봤더라면 이유를 물어봤을 텐데.


할머니는 늘 내게 베풀기만 하셨고 난 받는 것에만 익숙했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들, 아플 때 이마와 배를 만져주던 약손,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 아프지 않아도 팔다리가 여리다며 주물러주던 손길, 한사코 거절해도 입 안으로 들어오는 사과와 귤까지.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건 냄비와 배냇저고리다. 첫 손녀 결혼 고 너무 일찍 장만해 놓아 묵을 대로 묵은 살림들이 나는 싫었다. 할머니의 고릿적 취향을 믿을 수가 없었고 입씨름 끝에 세트 중 냄비 하나만 가져가는 걸로 타협을 봤다.


그로부터 얼마 후 태어난 우리 딸에게 노란 배냇을 선물하신 뒤,  할머니는 급성 뇌경색으로 세상을 달리하셨다. 일본 할아버지는 그때도 오지 않으셨고, 우리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할머니의 마음과 안목을 너무 몰랐다. 알고 보니 그 냄비는 독일 유명 제품으로 요즘 연속극에도 종종 등장하는 빨간 법랑 냄비다. 할머니가 그 냄비 세트를 사신 게 20년 전이었으니, 시에는 지금보다 구하기도 어렵고 큰돈이 들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마 눅눅한 지폐들을 꺼내느라 장판 밑을 비워야 했을 것이다. 늘 거절만 하는 손녀를 위해 할머니는 얼마나 큰 마음을 먹어야 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지금도 매일 빨간 냄비를 끓이고 닦으며 종종 할머니를 생각한다.



할머니는 무슨 낙으을까. 아마도 할머니의 삶에는 우리들과 그 집뿐이었을 것이다. 효도도 못하고 용돈도 얼마 못 드린 건 고사하고, 할머니가 챙겨 주시는 음식들과 물건들만은 거절하지 말걸 하는 깊은 후회가 든다. 한 번이라도 기쁘게 받았다면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웃으셨을까. 귤 한쪽 받아먹는 게 뭐가 어렵다고. 왜 그렇게 할머니의 손길과 선물들을 거절했을까. 왜 그 집을 지겨워하기만 했을까. 왜 그랬을까.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 토베 얀손, 《여름의 책》 중에서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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