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성향에 맞는 플랫폼이 있을 것이다. 이웃과 지인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간편함과 세련됨을 좋아하고 대중 지향적인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을 선호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익명성과 인식을 깨뜨리는 일, 그리고 고양이와 짧은 농담을 좋아해서 트위터와 맞는다고 생각했다. 모두 잠깐씩 간을 보았지만 각 플랫폼의 단점이나 한계를 경험하고 그만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브런치를 시작했더니 나와 비슷한 성향의 읽고 쓰는 분들께서 내 글을 진지하게 읽어주시고 의견에 반응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글을 쓰고 올리는 매 순간이 약간씩 감격스러웠다. 웃음만큼 눈물도 많은 인간이라서 진솔한 반응에 눈가가 촉촉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내 속에 있는 말들을 다 꺼내놓아 그런지, 글을 한 편 발행할 때마다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한 위로나 위안 같은 감정이 출렁거렸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를 읽으면서도 그런 기분이었다. 쓰고 싶었던 소재들을 선점(?)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도 했지만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성향은 어쩔 수 없다. 그 동질감에 아쉬움은 스르르 녹아버렸다. 대표적인 문장은 실패하고 실수할 때마다 글을 쓰면 된다고 다짐했던 나의 말과 닮은 “괜찮아,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였다. 어떤 면에서는 반가웠다. 모두가 실패와 실수와 불안에 너그러워지는 사회를 상상하니까 환한 불이 켜진 느낌이었다.
쓰는 근육이 한번 생기고 나면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을 내가 ‘쓰는 태도’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경험을 받아들여 활자로 바꾸는 과정이, 밥을 삼켜 소화하는 과정과 비슷해진다.
이윤주 작가가 말한 ‘해석’의 과정을 나 또한 경험하고 있다. 전에는 단발적인 짧은 구절로 수동적인 생각을 했다면, 글을 쓰고부터는 완성되거나 이어지는 문장 형태로,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관점 역시 완전한 나 중심에서 이루어졌던 생각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의 완성된 문장은 나를 두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나의 경우 “내가 쓰는 글이 나를 본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나아가 “내가 쓰는 글이 나를 ‘돌’본다”라고 말한다.
그랬다, 내 글은 나를 보기도 하고 나를 돌보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점점 단단해졌고 어떤 면에서는 유연해졌다. 글을 쓰기 전의 내 마음이 하나의 선과 뾰족한 귀퉁이들로 이루어진 세모였다면 글을 쓰는 나는 크고 작은 다각형들이 겹겹이 자리하면서 둥글어져 마치 커다란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을 때 일어나는 잔물결의 파동 같은 모양이 된 것 같다.
그들이 “짜증 나”라고 말할 때, 그중 일부는 슬픔일 것이었다. 일부는 불안, 일부는 외로움, 일부는 실망감, 일부는 분노, 일부는 허무, 일부는 지리멸렬이었을 것이었다.
타인을 향해 짜증과 한숨으로 표출되는 감정의 뿌리에는 정확히 어떤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한 반응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내 이기적인 욕망의 좌절인지, 수치스러운 경험인지, 두려움이나 혐오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 했고, 글쓰기는 돋보기가 되어 주었다.
안갯속에 길을 잃었을 때 오직 안개만을 감각하는 사람은 제자리를 맴돌지만 이슬을 감지하는 사람은 풀과 바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에세이가 술주정이 되지 않으려면〉이라는 꼭지에서 자기 이야기를 쓸 때 과장하지 말고 연민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쓴 글은 “유익하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지루”하며 “자신과의 거리가 너무 멀면 고유성이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에세이란 곧 “‘고유한 나’를 ‘이 넓은 세계의 어디쯤에 둘 것인지의 문제”라는 그의 말도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글을 읽고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릴 때 부모님에게 혼나거나 서러운 일이 생기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내가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불쌍한 아이를 둔 엄마 아빠가 불쌍해지고, 할머니도 불쌍해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불을 들썩거리며 통곡을 하곤 했다. 그런 상태에서는 감정의 배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덜 불쌍해질 일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제 나이는 낯설고 마음속엔 자라지도 가출하지도 않는 어린애가 칭얼대고 있으므로, 시간과 화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글을 쓰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를 자꾸 꺼내보게 된다. 그러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를 인정했을 때, 거부감이 일던 그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타인을 조롱하며 웃음거리로 삼기보다는, 못난 자신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사람이 멋지고 정이 가는 것처럼. 글 쓰는 나는 인정하는 내가 될 수 있어서 좋다.
성정 탓에 기자 시절에 맞지 않는 분야의 글쓰기지만 열심히 했다는 그처럼, 나 역시 맡은 일을 최소 3일 전에는 끝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이다. 그래서 글쓰기도 하루에 한 편 이상은 꼭 쓰기로 하고,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마감(?)에 쫓기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몇 편쯤 서랍에 담아 두니 여유가 생기고, 이 여유는 여러 번의 퇴고를 가능하게 하며 또 다른 쓸 거리를 만들어낸다. 매일의 글쓰기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돌보기도 한다. 그래서 글쓰기를 놓을 수 없다.
책 정보 :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윤주 글, 위즈덤하우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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