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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un 23. 2022

마약 같은 여행, 산책 같은 여행

문장과 세계 #15


점심 식사를 하며 동료와 여행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주변에서도 다시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어서 화제가 된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들을 두고 오래 집을 비울 수 없어서 여행을 되도록 가지 않고 가더라도 짧게, 가까운 지역으로 가는 편이다. 그래서 주 여행지는 주변 국가에 한정된다. 아쉽지는 않다. 여행 물론 좋지만 집에 있는 것도 참 좋아하니까.


그런데 일단 여행을 가면 그 장소를 온전히 즐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여행 계획을 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다 해놓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들 불만 없이 즐겨주니 큰 문제는 없만 조금 빡빡한 일정을 버거워하기는 한다. 내 딴에는 계획의 50% 정도만 소화하는 여유 있는 일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계획을 한 번에 다 소화하지 못해서일까? 갔던 여행지를 다시 찾는 것이 오히려 좋다. 후쿠오카와 오사카, 보라카이 다시 간다면 세 번째가 될 것이고, 대만과 북해도와 오키나와도 다시 방문하고 싶다. 알고 있는 곳은 더 속속들이 즐길 수 있고, 유명 관광지가 아닌 다른 루트로 가볼 수도 있어서 재미가 배가된다.



어릴 때 규모가 큰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을 손에 쥐면 세상이 다 내 것인 듯했다. 모든 놀이기구를 다 맛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타고 싶은 놀이기구를 타려는 사람은 너무 많고, 끝이 없어 보이는 줄 맨 뒤에 서서 오랜 기다림을 견뎌내야만 그 재미를 겨우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면 날은 어느새 저물녘이 된다.


 놀이기구를 섭렵하고 조금씩 다른 스릴을 맛보아야만 집에 가겠다고 생각했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지금 내가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인 것 같아 조금은 멋쩍다. 이제는 그런 장소에 간다면 아슬아슬한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초록 지붕 아래의 벤치에 앉아 아이들과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놀이동산의 즐거움을 충분히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느낌 때문었을까, 부모님들께서 늘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지구촌 세계 여행〉 같은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시청하시는 이유가. 시간이 날 때마다 TV 여행을 하시면서 힘도 돈도 들이지 않고, 무엇보다 직접 가서도 다 보기 힘든 것들 편안하게 즐길 수 있어서 좋다고 말씀하신다. 쏟아지는 폭포를 하늘에서 비추는 앵글을 따라가시며, 렇게 높은 곳에서도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하고 말씀하신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직접 경험 없이도, 집에서도 매일매일 여행하는 듯한 기분으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사유는 젊음이 한창일 무렵에는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직 나는 놀이공원에서처럼 여행지에서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여행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 매일이 여행지에서의 첫날처럼 설레고, 마지막 날처럼 아쉽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여행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게 해 주고 현재를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이 낯선 관점이 유발하는 비일상 이국적인 풍경과 맞물리며 설렘을 준다. 그렇지만 아무리 새롭고 설레는 일도 무한히 지속될 수는 없다. 자극이 계속되면 휴식이 절실해지고 집이 그리워진다. 렇게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성립된다.


여행을 즐기던 동료 이제는 집에서 고요함을 즐기는 일도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여행에서도 허무 비슷한 감정을 맞닥뜨린 탓일까. 일상이 지루하고 답답해서 떠난 여행이라면 그만큼 충족해서 돌아와 일상을 잘 살아야 하는데, 여행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한동안 여행을 가지 못하면 지루함과 허무가 스멀스멀 기어 라오고, 그렇게 되면 여행하지 않는 시간은 견디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보통은 한 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여행은 분명히 일상을 살아낼 힘을 충전해 주지만 여행이나 특별한 이벤트 없이도 스스로를 충전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곳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경험도 좋지만, 내 집에서 나만의 루틴으로 밥을 달게 지어먹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일도 특별하게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여행이 삶을 견디게 하는 진통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행은 산책처럼 즐겨야 한다.





인용한 글 : 《여행의 이유》 김영하 글, 문학동네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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