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후배이자 친한 친구와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문래에서 먹은 로제 와인 맛을 잊지 못해서 친구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어 다시 찾은 것이었다. 엌, 그런데 일찍 퇴근한 탓에 오픈 시간이 되려면 두 시간이나 남았다. 어쩔 수 없이근처에 영업 중인 카페로 향했다. 평소라면 사람이 많아서 피했을 핫플레이스라는데 이른 시간이라 한산했다.지붕 틈새로 오후의 빛이 쏟아져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친구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 분주하게 기획을 하는 중이다. 반복되는 일은 의미를 찾기가 어렵고 새로운 일은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막연함과 불확실성 때문에 힘들다. 적은 인력으로 준비하느라 불면의 밤을 보내며 휴일에도 퇴근 후에도 일 생각 중인 친구.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어려움과 실수와 실패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훌훌 털어놓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도 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카페에서 나와 골목을 거닐다가 두 개의 작은 전시가 있기에 들러보았다. 먼저 들른 곳은 오래된 단층 건물에 흰 페인트질을 한 게 전부이고, 벽을 부순 자리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데도 여느 전시장 못지않게 멋스러웠다. 서울에서 가장 먼바다인남해와 제주를 그린, 초록과 보라가 어우러진 그림 전시였는데오밀조밀한 바닷가 마을의 풍경그림이 산뜻함으로 다가왔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삶은 어떠할까. 복작복작한 서울에서 매일 출퇴근하는 삶과는 결이 아주다르겠지. 같은 듯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화폭에 옮기는 삶이란 넉넉한 기분일까, 고독한 마음일까? 그림이 아기자기하고 따뜻하니 넉넉하고 푸근한 삶일것이라고, 그렇지만 나름의 어려움 또한 있을 거라고짐작해 본다.
다음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학교 학비지원 자선 전시회였다. 그림 작가가 네팔 현지에서 그린 작품과 아이들을 교육하며 함께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계절마다 날씨마다 다른 히말라야 설산의 풍광이 작가의 프레임 속에서는 웅장하게 자리하고, 아이들이 그린 부채 속에서는 명랑하게 살아 있었다. 작품을 구매하지는 못하고 기부함에 조그마한 마음을 넣고 나오려는 차였다.
감사합니다, 네팔에 놀러 오세요. 방문하게 되면 꼭 들러 주세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입구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이 건넨 말이다. 네팔의 아이들이 열악하게 공부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술 공부는 더욱 하기 힘들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네팔에 오라고, 오게 되면 연락하라며 전시 안내문을 가져가라고 권한다. 그냥 넘겨보고 내려놓았다가 거듭 권하기에 마지못해 하나를 집어 들어 가방에 넣었다.
와인바로 자리를 옮겨서 우리는 각자의 고됨을 술 한 병에 나눠 마셨다. 일 얘기만 나눈 것은 아니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였던 불어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 겨우 떠오르는 건 메르시보꾸, 메종, 무슈, 마담, 쁘띠뿐이라는 것. 그리고 술 먹는 걸 싫어하시는 엄마에게 취한 모습을 들키지 않는 노하우 같은 것들. 이렇게 현실 수다를 나누다 보니 네팔의 그림은 금세 잊고, 붉어진 얼굴만큼 우리의 이야기도 달아올랐다.
며칠이 지난 오늘에야 문득 생각이 나기에 브로슈어를 꺼내 보고 검색을 해보았더니,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를 하지 않은 채 나를 초대한 이는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친 다정 김규현 작가 본인이었다. 그는 티베트 문화를 공부하면서 히말라야의 매력에 빠졌고, 부인과 사별한 뒤에는 네팔로 건너가 안나푸르나의 한 초등학교 명예 교장이자 미술 교사가 되어 7년째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브로슈어에 그의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 네팔 주소가 적혀 있는 걸 보니 그는 내게 빈말이 아닌 그 순간의 진심을 건넸던가 보다. 남는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잠시 들른 그 공간에서, 나의 보잘것 없이 쉽게 건넨 마음에 그는 진솔한 초대의 말을 한 것이었다. 왜인지 그의 말이 자꾸 울림으로 번져간다.
아무래도 인터뷰 기사에서 본 그의 말 때문인 것 같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고 얘기한, "아이들 밥 한 술 떠먹이기 위해서"라는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다. 히말라야 산기슭 아래 조그만 학교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을 아이들, 그림 한 장에 밥 한 술 먹을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살면서 네팔이라는 나라에 갈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으면서도, 그럼에도 이 초대장을 쉽게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