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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un 06. 2022

노동자도 신여성도 그저 사람인 것을

박서련, 《체공녀 강주룡》을 읽고


(소설의 결말 일부 포함)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책을 접했다. 작가의 의도인지, 강렬한 첫 장면으로는 역사인지 현대물인지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1부 이야기로 들어서며 비로소 시대와 장소를 짐작할 수 있는 단어가 등장했는데 간도 사투리가 어찌나 찰지던지, 작가의 필력과 표현력이 대단했다. '철필’이나 '사나', '모단 껄'처럼 낯선 단어의 의미를 추측해보고 발음해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여기에 흥미로운 전개가 맞물려 몰입도가 깊었고, 듬성듬성 해학과 소소한 즐거움이 묻어났기에 이야기 초반에는 인물의 고된 여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간 압록강 부근 서간도 지역, 그 시절 그곳에서의 삶은 어떠했을까. 모두가 힘들었겠지만은 서민 여성의 삶이란 두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주룡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부모에게 떠밀려 결혼하고, 남편의 말 이끌려 독립운동에 입문한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네다.
내 손으로, 어서 그래하고 싶었습네다.

그러나 주룡은 제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지들에게 떠밀리고, 남편과 헤어지고, 시가에서도 내쫓겨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까지가 강주룡이 삶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날들이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동안에도 그는 제 소명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이만하면 오늘도 떳떳하다.


그의 교육기관은 그의 삶 자체였다. 삶의 굴곡마다 그는 무너지는 대신 배우고 강해졌다. 재혼만큼은 부모에게 떠밀릴 수 없어 강주룡은 집을 떠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의지를 펼치기 시작한다. 고무공이 되어 노동자로 일하면서 신여성이 되고 싶던 주룡은 노동 운동의 물결에 올라타게 되고, 사회의 변혁에 눈을 뜬다.


여직공은 하찮구 모단 껄은 귀한 것이 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 말든, 관리자가 그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얐다는 것.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위대한 지도자들이 그의 성정을 알아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군이나 인텔리에게 지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하고 마는 주룡의 모습은 기개가 넘쳤다. 지식인들 무리에게 기죽지 않고 부인들에게도 계몽을 하라며 일갈하는 그는 진정 시대를 이끈 선구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주변의 실수와 잘못에는 늘 관대했고, 자신에게는 반성과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 외유내강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가 노동 운동에 발을 들이고 전면에 나선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성향이 아닌 동료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두를 위해 스스로 기꺼이 ‘격발을 시켜줄 방아쇠’ 노릇을 자처했다.


또 동무를 하나 잃었네.  이상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가슴을 주룡은 어루만진다. 윗가슴에서 돋아난 뼈들이 선명하게 손에 집힌다. 우리처럼 생긴 뼈 안에 뭔가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끝까지 읽기 전까지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오해했다. 체공녀(滯空女), ‘남을 또는 막힐 체’에 ‘빌 공’ 자를 써서 교육이나 지식을 얻지 못한 여성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은유가 아닌, 그가 만든 장면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단식으로 주린 몸이 뒤집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등을 곧춘 바른 자세로 ‘저항의 몸짓’을 실현하려는 주룡, 기어이 정신이 몸을 놓아버리는 순간까지도 제 이름을 외쳐보던 주룡. 이야기 뒤편에 실린 흑백 사진 속, 한옥 지붕 위에서 웅크린 채 홀로 생각에 잠긴 그 모습을 보자니 가슴 한 편이 뻐근해진다.


이 책을 읽고 역사란 알려진 사실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진실들을 발견해 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지붕을 넘어 굴뚝과 크레인 위에 올라가 강주룡의 삶을 사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이 뼈아프다.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책 정보 :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글, 한겨레출판사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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