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떻게 다른 종들보다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을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의 역사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따라 이루어졌고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비결은 언어를 통한 상상의 질서가 화폐와 제국, 종교 등의 수단으로 보편적 질서를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믿는 인간에 대하여》를 쓴 한동일 작가는 인류 진화의 열쇠를 ‘겸손’이라고 표현했다. '인류-후마니타스'와 '겸손-후밀리타스'의 어원이 유사함을 근거로 제시하며, 인간이 부족한 능력을 인정하고 이민족으로부터 언어나 종교 등을 ‘겸손하게’ 수용하며 진화했다는 견해였다. 두 관점 모두 결핍이나 한계를 가진 인간의 능력에서부터 사유를 이끌어냈지만 유발 하라리는 사회현상학적으로, 한동일은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여 인류 진화를 해석했다.
나의 입장에서 볼 때 ‘겸손’이란 매우 온화한 관점이고, 그보다는 정복욕과 폭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관점은 다르지만 그의 다정함과 문체에 이끌렸다. 무엇보다 종교는 없지만 발생 과정과 작동 원리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성직자가 말하는 종교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더불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그의 고뇌를 읽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었다.
너만이 연주하도록
신이 네게 준 악보는 어디 있는가?
유신론은 자칫 운명론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지만, 그는 ‘운명’ 대신 ‘사명’이라는 말로 저 문장을 설명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연주해야 할 악보를 지니고’ 태어나는지도 모른다고. 사명은 주어졌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맞는 악기를 스스로 찾아야 하고, 그 악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만 ‘완성형 연주’에 이를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외롭고도 고독한 것이라고.
삶을 이러한 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성직자로서 그는 종교가 인간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해 왔다고 한다. 그 과정은 전작인 《라틴어 수업》에서부터 이어졌고, 《믿는 인간에 대하여》를 집필하면서 그는 성직자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그저 한 명의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로 했다고 고백했다. 그의 삶의 궤적을 바꾼 이 책을, 나는 가능한 천천히 읽는 수밖에 없었다.
종교가 헛된 희망과 거짓된 기대로 과대 포장한 선물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종교인들이 스스로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불안한 인간 존재에게 신실하고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써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5p.)
그는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종교의 역할을 고민했다. 그곳에서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도와 비 유대교도를 나누는 장벽을 경험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일하는 엄마를 만날 수 없어서 우는 이스라엘 지역 아이들을 보고 그는 ‘이 아이들이 엄마를 만나는 일이 신이 해결할 문제인지’를 질문한다. 그 답은 욕망하는 인간들이 신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려오는 이슬람교의 기도 소리를 듣지 못한 날, 그는 고요와 평화를 느낀다. 기도가 없는 세상이야말로 진정 평화로운 세상이며 그러한 세상에서는 종교가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런 부조리를 경험한 뒤 성직자인 그는 종교가 없는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게 되는 역설을 발견한다. 이렇게도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인간들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신은 부조리하지만, 인간은 더 부조리하기에 신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살아오면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진행되는 일들을 겪을 때마다 그는 '그저 불평만 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한탄하기보다는 기도를 통해 승화하는 쪽을 택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답이 온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윤리적, 사회적 책무가 요구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을 떠올리면 저는 사막의 하루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막의 하루는 매일 똑같을 것 같지만 하루도 똑같지 않습니다. 사막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어제까지 길이었던 것이 길이 아니게 됩니다. (...) 그래서 사막을 걷는 사람은 땅에 난 길을 보고 걷지 않는다고 합니다. (...) 어떤 별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가는 걸음의 방향은 달라질 겁니다. (214p.)
그의 고뇌를 따라가면서 성직자라고 해서,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서, 발화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많은 비난과 책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똑같이 모순적이고 망설이는 인간이다. 위대한 사람은 없다. 위대한 질문과 위대한 실천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오직 스스로의 깨달음과 의지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책 정보 : 《믿는 인간에 대하여》 한동일 글, 흐름출판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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