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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un 18. 2022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의 선택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을 읽고


《천 개의 파랑》을 읽고 서평을 쓰다 보니 이 작품을 읽고 만 것이 자꾸 밟혔다. 두 작품은 유사성이 존재한다.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고 부족함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로봇이 인간을 위로하게 된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주제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은 각기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로 인간과 삶과 관계를 탐구한다.




비행기 사고로 아들을 잃고 홀로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 그에게 아들의 시신 대신 로봇이 도착한다. 그는 로봇에게 '은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일한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을 본떠 만들었지만 감정도, 욕망도, 실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로봇까지 필요한 이유가.



로봇은 정면과 측면 등 여러 데이터베이스가 누적되어야 비로소 대상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인간은 실루엣만 보고도 대상을 구별해낼 수 있다. 반면 인간은 발화하지 않은 의도를 상대가 알아차리기를 원하는 모순을 갖고 있고, 그런 의도를 발화 외적인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 인간은 과부하가 걸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일처리를 할 수 있으며 우선순위를 자연스럽게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차원으로 인지하고 사고하므로 인간의 장점은 로봇의 단점이 되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로봇은 인간의 부족함과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만약 그 너머의 기능도 있다면, 인간은 어느 쪽을 택할까? 천선란, 구병모 두 작가는 편리함보다는 인간을 위로하는 로봇과 덜 외로울 수 있는 미래를 상상했다. 이토록 다정한 상상력이란.




은결이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 중 하나는 관찰하고 매번 다시 학습하는 일이었다.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전후를 비교하고, 그들의 반응과 경험의 누적을 종합하여 인간들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그렇게 명정의 건강 이상을 감지하고 시호의 성장을 지켜보고, 준교의 감정을 읽어낸다.



은결은 시호를 특별하게 여긴다. 소녀 때부터 성장 과정을 지켜본 그가 어른이 되어 세상의 시름을 겪는 과정들을 묵묵히 관찰한다. 이별과 폭력을 겪고 마음을 다친 시호는, 은결에게 자신이 겪은 힘든 일을 토하듯 쏟아낸다. 사람과 달리 섣불리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에 발화할 수 있었던 비밀스런 말들이었다. 그러나 은결은 놀랍게도 이야기의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며 뜻밖의 위로를 전한다.


진정한 위로는 이해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은결은 학습과 인지의 반복을 통해 감정 비슷한 것을 표현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은결의 변화를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 오류라고 생각하기도 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작가는 그 실체가 정확한 이해나 인식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은결의 이야기를 통해 제시한다.




세탁소라는 공간은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을 하는 곳이다.  땀이나 피를 지우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얼룩과 냄새를 제거한다. 그렇기에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도 알기 힘든 상황을 짐작하게 되기도 한다. 이 공간성은 은결의 관찰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삶과 인간관계는 여러 은유로 표현되는데, 주로 삶을 빨래에 비유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긴 시간인 듯 하지만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한낱 작은 점일 뿐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간과, 그렇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세제 한 스푼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찰나의 시간, 금세 풀어지는 작은 가루와도 같은 인간들이 존재 의미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눈 앞에 닥친 문제와 감정이 우선인 인간이기에 이 철학적인 난제는 늘 후순위가 된다. 그래서 자신을 배제하고 타자를 관찰하는 존재인 로봇에 기대어 실마리를 찾는다.


사람은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람은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는가, 사람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가, 위로의 대상은 누구여야 하는가, 그것이 꼭 가족이나 신이나 혹은 사람이어야 하는가.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궁금하다면  《한 스푼의 시간》과 《천 개의 파랑》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책 정보 :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글, 예담 펴냄

함께 읽은 책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글, 허블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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