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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y 26. 2022

하늘만큼 활짝 열려 있는 가능성의 세계

천선란, 《천 개의 파랑》을 읽고


언젠가부터 하늘을 관찰하는 좋은 습관이 생겼다. 하늘은 올려다볼 때마다 다른 모습이다. 청명하게 맑다가도 세상을 뒤엎을 듯 먹색 기운을 뿌리는 날도 있고 뭉실뭉실 허옇게 덮어 하늘 한 조각도 허락하지 않는 날, 그러다가 작은 틈새로 찬란한 빛 내림을 하사하고, 빨갛게 달아오를 준비를 하는 어둑새벽과 핑크와 보라가 섞인 화려한 노을을 선물하는 날까지.


하늘이 그곳에서 그렇게 빛나는데
어떻게 바라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 날엔 평소와는 다른 높이감에 감탄하고, 옅고 짙은 색감이 그저 신비롭고, 순간순간 다르게 번지는 구름에 넋을 놓는다. 이렇게나 다양한 하늘을 감정 아닌 인지 능력만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구름의 양상과 날씨의 상관관계는 그렇다 치고 깊이감과 널따란 품과 다채로운 색을 어떤 과학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지. 하늘은 이해와 인지 너머 무언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로봇에게조차 숨기지 못한 것이다. 매 순간 다른 가능성이 펼쳐지는 공간이니까.




콜리는 우연한 사고로 학습 능력을 얻 휴머노이드 기수다. 콜리는 경주마 투데이가 달릴 때 행복해하는 것을 알아보지만 물리적인 고통을 느낀다는 걸 인지하고 달리기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 낙마한다. 망가져서 폐기 처분이 되기 직전 콜리는, 화재 사고에서 3%의 생존 확률로 살아난 보경의 딸이자 하필 그날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겨서 경마장에 들른 연재에게 발견된다.


 

연재는 감당해야 할 게 많은 아이다. 아빠의 부재와 엄마의 고단함, 장애를 가진 언니를 돌봐야 하는 책임까지. 설명하고 해명해야 할 것들에 지겨워할까 두려워 친구를 미리 차단해버린다. 삶의 무게에 외로움까지 감당해야 하지만 몫이 많다고 불평하지 않는 아이. 그런 연재가 로봇을 좋아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설명하거나 이해받지 않아도 되고 감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콜리를 고치 연재는 생기를 찾는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말 그대로 살아있는 기운, 저답게 삶을 누리는 기분을 느낀다. 때마침 연재의 재능과 가능성을 발견한 지수가 연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지수는 로봇 대회라는 필요에 의해 연재를 선택했지만 상대의 무심함에도 지치지 않고 관심을 표현하고 기다릴 줄 아는 건강한 친구다. 수는 세대를 넘어 견고하게 만들어진 삶의 격차와 굳게 쌓아 올린 재의 벽을 허어버린다.



한편 콜리는 달리지 못하는 말 또한 자신처럼 인간에게 버려질 거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투데이는 인간의 쾌락을 위해 쳇바를 돌다가 죽게 될 운명을 맞 것이다. 그런 투데이를 은혜는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했다. 자신 때문에 힘든 가족들과 장애인으로 자신을 분류하는 친구들, 불편함이 고정된 세계와 무례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지겨웠고 그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평온을 투데이에게서 얻었던 은혜였다.




마음의 문을 닫은 연재와, 남편을 잃고 정지된 시간을 살아내 보경을 바꾼 건 콜리와의 대화다. 감정이 있기에 인간은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오해를 내버려 두면서도 자신은 이해받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달리 콜리는 말하지 않은 것을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갈등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표현한다. 콜리는 질문을 함으로써 가라앉은 그들의 내면을 뒤흔든다.

 


상처 가진 이들은 콜리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슬픔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고, 삶의 버거움을 덜어내게 된다. 콜리 자신고통을 느끼지 못하면서 타자를 관찰하며 행복과 고통을 감지 줄 안다. 투데이의 호흡, 아침과 저녁에 무게감이 다른 보경의 발소리, 연재가 발산하는 몰입의 열기를 통해 감정을 인지한다. 콜리의 질문을 시작으로 인물들은 근본적인 물음을 주고받으며 자신을 들여다보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콜리는 고통이 인간을 살게 하고 성장시켰다고 추론했는데, 고통 때문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이 되고 성장을 멈추기도 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인간이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유도 제 고통이나 쾌락 때문일 것이다.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콜리가 소크라테스 문답법을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들은 왜 자신의 쾌락과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타자에게 기대고 파괴하기까지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인간들을 위해 어떤 생명들은 생애를 모두 바쳐야 하는 것인가. 감정과 고통이 없는 휴머노이드가 인지만으로 삶의 무게를 느끼는데, 말이 느끼는 생의 고통과 허무는 얼마만큼 깊을까.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가능성 있다는 것이다. 보경이 3%의 생존율로 살아나 300%의 삶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여러 인물들은 콜리를 살리려는 연재, 그리고 투데이를 살리려는 콜리와 은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이렇게 방향을 조금만 바꾼다면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연재는 괜찮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로봇 대회를 치르면서 연재는 훌쩍 성장했고 연재 옆에는 이야기 나눌 가족이 있고 친구생겼으니까.




책 정보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글, 허블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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