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May 31. 2022

사랑하고 싶은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을 읽고


사람들은 사랑을 원하지만 왜 그토록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을 그저 모성애처럼 당연하게, 또는 성애처럼 우연한 것로 받아들인다. 1) 사랑을 하는 문제가 아닌 받는 문제로 생각하고 2)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만 찾으면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3) 사랑을 하게 되는 경험과 머물러있는 상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맞다, 지금껏 그래 왔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 사랑도 기술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인식하는 게 사랑을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며, 기술을 배울 때처럼 자세를 익히는 것이 두 번째 단계라고 말한다. 그보다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정희진 작가는 사랑에 대해 친구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념과 대상, 방법을 염두에 두고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그러자 친구는 한심해하는 투로,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했다'라고 재정의했고, 그는 꼼짝없이 수긍했다는 일화였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일까? 에리히 프롬이 정리한 대로 따라가 보자. 인간은 원하지 않게 태어나 언젠가 죽게 될 것을 안다. 자연과 사회 앞에 자신이 무력한 존재라는 것도 안다. 이런 인식이 인간을 세계나 자신과 분리되게 만들고, 분리는 불안과 수치심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인간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려는 절실한 욕구를 갖는다.



그는 분리 극복 욕구에 대한 질문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서 동일하게 작용했고, 대답은 다양하다고 했다. 동물숭배, 인간 정복, 도취, 사치, 금욕, 성취, 예술, 종교, 철학, 연애... 가만, 그러고 보니 이들은 모두 사랑의 각기 다른 형태이자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역사가 아닌가. 읽기와 쓰기도 마찬가지다.




합일의 욕구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식하고 욕구의 답이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면, 다음으로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대상을 모르고 자신도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채 섣부른 사랑을 하려고 한다면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 없이 자신을 알기란 쉽지 않으므로 서투른 사랑을 경험하며 배워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예를 들면 친구와 문제가 생겼거나 연애를 할 때, 또는 자녀를 키우면서 몰랐던 자신을 발견다. 이런 상황에서 대상을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해 버리면 자아 발견은 없다. 나의 한계와 대상의 한계를 인식해내야만, 즉 자기 객관화를 통해서만 관계와 문제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나 역시 육아를 하던 시기에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나 짜증을 밖으로 잘 내지 않는 내 속을 뒤집고 인내심을 탈탈 털어버린 사람은 우리 딸과 개발자(!)였다. 육아와 일을 누구보다 해내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었고, 이 관계를 통해서 나 역시 그리 성숙하지 않은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개인적으로는 사랑할 기회를 차단했을 것이고, 업무적으로는 혼자만 잘났다고 착각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처럼 반성이 없거나, 자존감이 결여되거나 또는 자의식이 비대한 상태로는 성숙한 사랑을 하기 힘들다. 자아도취를 극복하고 나면 외부의 세계를 내면세계의 상징으로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을 할 기본적인 준비가 된 것이다.




사랑의 기술이란 멋지고 잘난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 아니었다. 사랑은 곧 삶의 다른 말이기에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은 곧 삶의 태도였다. 내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성숙하게 사랑을 할 수 있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은 스스로를 성장시킨다. 이것이 또 사랑의 단단한 토대가 되며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준비가 되었다고 다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희진 작가가 앞선 일화를 꺼낸 것은 "모든 비극은 경험의 시간 차에서 온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들이 나와는 다른 시간을 살기 때문에 사랑은 비극이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간은 그들을 태우고 멈추지 않고 나를 앞지른다.


그러니 우리는 더더욱 자신에게만 도취되거나 매몰될 여유가 없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삶의 태도를 맞춰 가면서 조금 더 적극적이고 온화하게 사랑을 실천해 보아야겠다. 그 방법은 먼저, 내가 그들에게 거는 추상적인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다. 기대라는 건 결국 받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이니까. 그런 다음엔 그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대상을 충만하게 사랑하면 되는 것 아닐까. 가족을, 고양이를, 일을, 이웃을 그리고 읽기와 쓰기를 말이다.




책 정보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글,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함께 읽은 책 :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글, 교양인 펴냄



Photo : pixabay.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