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Jun 24. 2022

문명이여, 그의 황홀을 깨뜨리지 마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읽고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책을 읽는 즐거움에 눈 뜬 노인이 환경 파괴에 맞서 싸우며 일어나는 일을 담은 이야기다. 노인이 경험하지 못한 먼 시공간 정제된 언어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계와 그렇지 못한 현실의 사건이 대비되며 몰입도 높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에 담긴 메시지와 아름다운 표현, 전개 방식 탓에 읽을 때마다 내 작은 심장에 망치질을 하는 책이다.




우중충한 배경 속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은 치과 의사다. 낡은 회전의자가 전부인 진료소에서 는 ‘이가 썩고 아픈 것은 정부 탓’이라며 일갈한다. 그가 정부 목한 이유는 법이 도달하기 힘든 아마존 밀림 지역에서 착취와 전횡을 부리는 공무원 때문이다. 바로 그 공무원 읍장과 의사 앞에 이방인의 시체가 도착한다. 읍장이 시체를 발견한 원주민을 살인자로 지목하자 반발하고 나 이는 이 책의 주인공,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영감이다.



노인은 논리적으로 읍장의 억지를 반박하고 비상한 추리로 남은 사람들도 위기에 처했음을 경고한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읍장은 공문을 작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시신을 처리하는 절차도 현실과는 동떨어져 실무자를 괴롭힌다. 이런 먹물들의 관행 치과 의사 노인 증오 부추긴다.




치과 의사와 노인의 화제는 뜻밖에도 연애 소설로 전환된다. 책을 구하기 힘든 지역에서 노인을 위해 치과 의사가 공급책을 맡은 것이었다. 노인은 가슴 아픈 이야기, 진정 사랑해서 불행했던 연인들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갈구한다. 이런 노인의 독서 취향 덕에 치과 의사는 얼마간 머리가 아팠지만, 적절한 도우미를 찾아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아. 그것은 그의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을 것이 없었다.



노인은 책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긴다. 겨우 읽을 줄만 알고 쓸 줄을 모르는 그였기에, 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다. 세상에 볼 수 있는 책이 단 두 권뿐이라면, 그래서 노인처럼 꼭 씹고 소화한다면 책은 어떤 의미가 될까. 그러한 읽기는 얼마나 황홀할까. 노인의 진중함 덕분에 나 역시 이 책을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읽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
그는 도대체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개간지에 정착한 이주민이었고, 그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다. 그는 개간에 실패한 뒤에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용서해도 실패만큼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밀림과 동물들 속에서 더불어 사는 법과 원주민처럼 사냥하는 법을 배웠다.



원주민들도 사냥을 하지만 이방인들의 사냥과는 다르다. 원주민들은 동물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법도에 따라 윤리적으로 사냥을 한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으로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죽이기 위해 기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문명은 달랐다.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에서 골드러시에 알래스카와 동물들이 멍들어 간 것처럼, 아마존도 문명에 의해 파헤쳐질 운명을 맞았다.




노인은 새로운 연애소설의 세계에 빠져들 참이었다. 천천히 문장을 읽으며, 단어 하나관형어 하나하나를 상상다. ‘유유히 미끄러지는 곤돌라’에서는 ‘유유히’가 마나 부드러운 움직임인지, 이제껏 보지 못한 ‘곤돌라’는 또 어떻게 생긴 카누인지 생각하고 또 상상하면서 ‘곤돌라!’라고 소리 내어 외쳐도 본다. 그러면 노인은 그 단어를 사랑하게 되다.



‘뜨겁게’ 키스한다는 것은 또 얼마만큼 격렬한 입맞춤인지 그의 경험 안에서 재현해보려 해도 도저히 닿지 않는 것이었다. 이 괴로움은 즐거움과 종이 앞뒷면의 차이일 뿐이다. 그의 읽기는 차분하고 정갈하, 정성스럽고 적극적일 뿐 아니라, 진행과 멈춤을 반복하면서 몰입과 확산을 넘나든다.


노다지꾼들과 도살꾼들의 침입이 빈번해지고, 골치가 아픈 읍장 때문에 노인은 소설 속에 빠져드는 자기만의 시간을 번번이 방해받는다. 제발 노인이 여유롭게 책을 읽도록, 지긋지긋한 사건들과 침입자들과 읍장을 이 세계에서 없애 버렸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 책을 사랑하는 노인, 자유롭게 사는 동물들과 원주민 그리고 아마존을 그냥 좀 제발 건드리지 말았으면.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루이스 세풀베다는 매우 적극으로 행동하는 작가였으므로 이 이야기 또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는 독재와 환경 파괴에 맞서 싸웠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코로나19로 세상을 달리했지만,   그린 세계와 그를 닮은 인물은 책 속에 켜켜이 남아 존재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노인의 황홀한 독서 생활은 이어질 수 있을지, 뒷 이야기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책 정보 :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글, 정창 옮김, 열린책들 펴냄

함께 읽은 책 : 《야성의 부름》 잭 런던 글, 권택영 옮김, 민음사 펴냄 (서평보기 ▶)




Photo : 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의 선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