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Jul 01. 2022

정처와 정인을 잃은 나의 분실물에게

문장과 세계 #17


장대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장마철. 로퍼 대신에 레인 부츠 신고, 접는 우산 대신 파란색 장우산을 골라 들었다. 우산을 들고 복작복작한 지하철을 타려면 조심해야 될 것이 많다. 물기를 털어주고 고정 클립을 채워 옆 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고, 우산책을 함께 들기 어려우니 손잡이가 구부러진 모양의 우산이어야 한다. 손목에 우산을 걸어두손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자리가 나서 우산을 기둥에 걸어 놓고 책을 읽었다. 내릴 역에 다다랐는데 좋은 문장을 발견했고, 잘 떨어지지 않는 플래그와 씨름을 하다가 그만 우산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고 말았다. 버스였다면 우산을 잊을 리는 없었을 텐데, 지하 세계를 오가다 보니 날씨 감각을 잊었고 우산 챙기는 일이 후순위가 되고 만 것이다.



역 밖으로 나온 뒤에야 우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 집과 사람을 잃은 우산은 아마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타고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여행을 한 뒤, 직원에게 발견되어 격리 조치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소한 물건들은 분실물을 모아두는 에서 제 쓸모를 다 하지 못한 채 낡아버리게 되는 것일까. 세상에는 이렇게 버려진 우산이 얼마나 될까. 그 우산들을 모아서 산을 만들면 제주도만큼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무지개섬이 될지도 모른다.




난 여간해서 뭘 잘 잃어버리지 않지만, 잃어버리고 기적적으로 되찾은 물건들도 있었다. 그 시작은 사회인이 되고 처음으로 장만한 검은색 반지갑이었다. 경로를 아무리 따져봐도 없어질 리가 없는데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몇 달 뒤에 발견곳은 회사 직원 휴게실 침대와 벽 사이였다. 오랜 기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모든 게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렇게 찾은 지갑을 다시 잃어버렸을 땐 내 것이 아닌 거라고 깔끔하게 포기했는데, 몇 주 뒤에 우체국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온 지갑을 받고 대단한 행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잃어버린 건  해외 여행지에서 일행 모두의 여권과 여비 들어있던 가방이었다. 호텔과 시내를 오가는 셔틀에 가방을 두고 내린 걸 발견한 순간, 커다란 징이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굳이 내려놓 두 손 가뿐하게 내린 5분 전의 나를 한없이 망한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차라서 찾을 가망 없었다.


일단 현지 사람들에게 상황을 얘기하니 그곳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고 찾은 사람은 10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는 말에 2차 타격이 왔다. 관광지이다 보니 돈이고 휴대폰이고 가방이고 한눈을 팔면 코앞에서도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으로 호텔 프런트에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초조한 20분이 지난 뒤 걸려온 전화는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다.   


- What kind of bag did you lose? Describe it to me.
- It’s brown shopper bag with animal pattern.
- What’s in the bag?
- There are passports in the bag.


이런 식의 취조가 끝나 잠시 후, 셔틀이 내게로 직진해왔다. 조수석에 앉아 가방을 흔들며 해맑게 웃던 호텔 직원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눈물이 왈칵 나게 반갑고 고마웠고, 나보다 현지인들이 더 놀라워했다. 주민과 관객을 포함해서 분실물을 찾은 사람을 처음 봤다고. 감사의 사례를 전하고 그 뒤부터는 물건들을 더 꼼꼼히 챙겼고, 모든 소지품들을 해외에서 여권 대하듯이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물건들이 주인을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해주세요!


우산을 잃어버리고 나니 언젠가 도서관에서 본 문장이 생각난다. 주어만 바꿔도 문장의 힘이 달라지고 감정 이입의 대상이 달라졌다. 사람은 여러 물건을 갖고 있으니 무언가를 잃어버렸어도 금세 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그만이지만, 물건에게 주인은 세상에 하나뿐인 것을.


이름도 표식도 없으므로 잃어버린 우산은 지갑이나 가방처럼 내게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것이었다고 증명할 수 없는 물건들은 내가 챙기지 않으면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그러니 5년 동안이나 궂은날마다 나의 지붕이 되어주었던 튼튼한 우산이 어느 구석에서 낡아버리기보다는 또 다른 누군가의 비막이가 될 수 있를.




Photo : pixabay.com & @especially


매거진의 이전글 풋풋함을 가득 담아 조물조물 무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