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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Aug 22. 2022

겨우 이해할 수 있었던 글쓰기

이연,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를 읽고


김보통의 <아만자>라는 웹툰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 고통 속에서 관념의 숲을 헤매던 청년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지금, 나의 손 안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고통을 안고 현실의 숲을 거니는 한 사람이 있다. 그가 책 바깥으로 건너와 내게 말을 걸고 있다. 오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오늘도 좋은 날이라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나는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을까. 책을 읽고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겪은 지난한 날들 중에서도 그가 묘사한 순간의 옅은 그림자뿐이다. 알 수 없는 원인, 퉁명한 통보, 차가운 검사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외로움, 이름보다 우선되는 병명, 독한 치료와 갖가지 부작용들, 떨어지는 컨디션과 흐트러진 일상, 불투명한 미래까지... 나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짐작할 수 없어도 그에게 조금 더 닿고 싶었다. 그렇게 겨우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삶을 지탱해 준 글쓰기였다. 무언가를 찾고자 시작한 것이었으나 바로 그 무엇임을 알게 되었다던 글쓰기, ‘죽음을 담보로 한 교환’이라고 표현한 글쓰기. 그의 글쓰기를 생각할수록 나는 점점 나의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를 읽어야만 했다. 고통을 공유할 수 없기에 타자임을 절실히 실감하게 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읽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그가 자신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말했으니까. 그가 읽지 못한 것은 여전히 그가 끌어안고 있는 절대적인 고통일까, 처절한 인정의 시간일까, 제목과는 다르게 너무도 달라진 일상일까 그도 아니면 수없이 겹쳐지는 감정들일까. 어쩌면 이 모두이거나 책에 다 쓰지 못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점점 모르는 것 투성이가 되어간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슬픔 공부가 필요한 나와는 달리 다른 어떤 약보다 필요했던 '슬픔억제제'를 스스로 처방해야 했다던 그에게, 그의 지난 힘겨웠던 날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알지 못해도, 짐작조차 힘들다고 해도, 눈빛만으로 그를 위로해 준 어떤 이가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더 평온하길 바라고 그가 사랑하는 숲이 그를 가만히 위로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전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전보다 나은 존재. 울음을 그치고 고민의 방향을 틀었다.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어떤 존재로 살고 싶은가.


차가운 의료 시스템 속에서 조각조각 갈라지고 대상화된 경험을 통해 그는 존재에 대해 수없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많은 아픔을 뒤로하고 앞으로의 존재를 향해 고민의 방향을 틀었다는 그는 숲처럼, 햇살처럼, 산들바람처럼, 여운을 짙게 남기는 힘 있는 글처럼 살기로 했나보다. 나에게 그는 그런 이웃이니까.




책 정보 :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연 글, 봄풀 펴냄


인용한 글 :

1), 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글. 한겨레출판사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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