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Aug 12. 2022

만년의 가치를 찾아서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을 말할 때 ‘만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만년필, 만년설, 만년 달력... 이름 앞에 일만만(萬) 자가 붙은 이 단어들은 인간으로 치면 백 세대의 생애를 넘어서고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가리킨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표현하고자 이런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일까?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어디 한번 가늠해 보자.


우리나라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하니 그 세월을 짐작해 볼 수 있고, 그 곱절의 과거인 B.C. 8000년에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으니 그야말로 까마득하다. 만년은 아마도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 세월을 감각하면서 ‘만년’이라는 이름만큼 변하지 않는 사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만년필이다. 쓸수록 닳아버리는 다른 필기구들과 달리 만년필은 외형과 필기감이 변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만년필을 쥐었을 때 손에 적당한 압력을 주는 묵직함이 획을 안정감 있게 그을 수 있도록 돕는 느낌이 좋다. 변형되지 않고 오래도록 사용하려면 세심하게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는 특징도 만년필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잉크가 마르고 닙이 굳어버릴지라도 따뜻한 물에 녹여 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고, 펜촉 끝이 망가져도 교체하여 사용할 수 있어 손에 익은 펜을 오래도록 쓸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다.



만년필에는 가능한 아름다운 글귀와 글자를 쓰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연필을 쥐면 저절로 자유로운 드로잉으로 이어지고, 볼펜을 잡으면 아무 생각 없이 의미 없는 낙서를 하게 되는 데 반해 만년필은 의식이 필요한 필기구다. 또한 만년필로는 아무 종이에나 쓸 수 없다. 잉크가 적절히 스며들어도 뒷장에 배어 나오지 않을 만큼 도톰한 종이라야 한다. 이렇듯 만년필은 글쓰기를 아름다운 의식적 행위로 만드는 섬세한 도구다.




만년 달력은 종이를 낭비하지 않고 오래도록 날짜를 셈할 수 있는 유용한 달력이다. 빳빳하고 질 좋고 제아무리 멋진 그림이 그려져 있어도 달력은 딱 일 년의 수명을 다하고 버려진다. 그에 비해 만년 달력은 무엇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고, 날짜를 스스로 조합하며 흐르는 시간을 체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주로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년 달력을 만들지만, 얼마 전 특별하고 아름다운 만년 달력을 만났다. 사용한 티백을 재활용하여 만든 것으로, 멋스럽고도 친환경적인 의미가 있어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 환경부 공식 블로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만년설. 그런데 만년설은 은유라고 하기 어렵다. 만년설의 사전적 정의는 [높은 산이나 고위도 지방에 언제나 녹지 않고 쌓여 있는 적설층]인데, 이 눈이 중력으로 인해 빙하가 되고, 빙하는 10만 년 간격으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다고 하니 지구 어딘가에는 고생대 이전에 내린 눈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녹지 않은 눈에 비해 사람은 얼마나 연약하고 짧은 삶을 살다 가는 것인지.



글을 쓰며 알게 된 또 하나의 단어는 ‘만년유택(萬年幽宅)’이다. 일만만에 해년, 그윽할유에 집택을 써서 만년 동안 깊게 잠들 집, 그러니까 무덤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들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유라지만 길어년 남짓 되는 생을 살다가 떠나는 인간은 무엇을 그리 오래 남기고자 만년이나 머물 무덤을 만드는가.


나의 연인은 반대하고 있지만, 죽어서까지 이생의 공간을 차지하고 싶지 않은 나는 어느 작은 나무 밑에 잠들거나 한 권의 책이 되고 싶다. 나무뿌리가 잎이 되고 낙엽이 되고 거름이 되고 다시 흙이 되는 과정이라면 일만년을 윤회해도 좋을 것이다. 혹시 운이 좋아 내 영혼이 한 권의 책으로 남는다면 어느 책장엔가 고요히 접혀 있다가 누군가의 손길과 눈길로 가끔씩 되살아나는 텍스트로 머물고 싶다.




Photo : pixabay.com


만년 달력 출처 :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에 온갖 신기한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