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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Aug 19. 2022

글쓰기를 쉬었더니 생긴 일

이틀쯤 쉬고 싶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부터 남모르게 매일 글을 발행해 오다가 130편 즈음부터 휴식을 갖기로 했다. 초반의 글쓰기 동력이 거셌으므로 차분하게 천천히, 공들인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하루 이틀이라도 휴식기를 가지면 글쓰기가 더 단단해지고 완성도도 높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발행을 며칠 쉬고 난 이후로 갑자기 글쓰기가 더 막막해지고 어려워진 것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써야 할지는 더 알 수가 없어졌으며, 지난 글들을 어찌 써왔는지도 갑자기 모르게 되었다. 글쓰기를 좋아한다던 나의 한계가 겨우 여기까지인가 싶어 두려웠다. 그 답답함은 글을 쓰면서 느꼈던 괴로움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며칠째 내 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의욕이 없었고 가슴속에서는 한 줄의 문장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텍스트를 무미건조하게 읽었다. 서너 권을 읽고도 화학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드라마 두 시리즈를 들이부어도 체한 듯이 꽉 막혀 있었다.



글감이 막히는 상황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자기만의 흔적을 남기려고 한 번도 노력해보지 않은 무사안일한 사람들만 그런 현상을 우습게 넘길 뿐이다. 그런 상황이 닥칠 때는 특정한 작업, 즉 글쓰기만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작은 신, 즉 당신이 결코 소멸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던 부분이 죽어간다는 징후다.


얀 마텔의 《20세기의 셔츠》를 읽으며 인상 깊게 본 문장인데, 이것이 나에게 곧 닥칠 일이라는 것을 읽을 때는 알지 못했다.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글을 쓰지 못하는, 다 써버린 나는 과연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인지까지 그 고민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대단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이런 고민이 된다는 것이 어쭙잖으면서도, 내겐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쓰지 못하는 건 쓸모없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글쓰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루치의 보람에서 글쓰기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은 뒤 이제 다시 조금씩 글쓰기 감각을 회복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잠시라도 글쓰기를 쉬어가겠다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다는 단순함이 행복의 열쇠였다.



소설 쓰는 일을 사랑하지만 즐겁고 재미있지는 않다. 예전에는 그런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치거나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내 글쓰기 실력보다 더 빠르게 커져서다. 내 필력은 더 나은 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을 때 아주 더디게 나아질 것이다. 나는 그 괴로움을 택하고 받아들인다.


장강명 작가는 《책, 이게 뭐라고》에서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글쓰기의 즐거움을 좀먹지만 그럼에도 그 욕심을 버리지 않고 괴로움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이제야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조바심보다 나은 글을 쓰고자 하는 괴로움을 택한 그의 용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한다.


그와는 달리 글쓰기 초보인 나는 쓰고 싶다는 열망을 미뤄두지 않기로 한다. 쉼 없이 쏟아내는 글에 어떤 의미를 담을 수 있을지 고민이 되고 완성도가 부족할지언정, 당장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나를 앞질러가도록 그냥 둔다. 못쓰는 것이 두워서. 무엇이라도, 한 줄이라도 쓰고 싶어서. 그리하여 오늘도 예민한 감각을 세우고 세상 일과 주변의 소리와 나의 감정에 귀를 기울여 본다.




인용한 글 :

1) 《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글, 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펴냄

2)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글, 아르테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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