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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Sep 08. 2022

타자가 선 자리를 살피는 마음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를 읽고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 /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심보선 시인을 알게 된 건 〈인중을 긁적거리며〉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탈무드에 따르면 아기가 천국의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천사가 입술을 꾹 누른 탓에 인중이 생겼다고 한다. 이 이야기로부터 시인은 타자를 망각한 자아의 한계를 성찰하는 시를 썼다. 이 시에 매료되어 그의 글을 찾아 읽었고, 독서모임 필독서로 그의 산문집을 추천하게 되었다.




그는 영혼과 예술 그리고 공동체라는 수수께끼이자 인생의 화두를 탐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글 쓰는 타자에 대한 부러움을 고백한다. 노년 시인이나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글을 쓰는 사람, 기타를 치며 노래할 줄 아는 사람, 백석이나 존 버거처럼 글로 기억되는 사람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그에게 글과 함께 삶을 영위했다고 여겨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든 쓰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찾기 위해, ‘말과 행동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표현’하기 위해, 영혼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그의 정의에 따르면 영혼은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며 과거와 미래를 통합하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다. 즉 삶의 모든 것은 ‘영혼의 문제’라 했다.


그의 아버지와 막스 베버는 삶과 예술을, 삶과 학문을 분리시키도록 조언했다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이 세계에는 발화할 권리와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이 너무도 많았으므로. 목소리와 존엄을 빼앗김으로써 영혼까지 휘둘리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그는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단순히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들의 탄식, 좌절, 환호성, 기쁨, 경탄이 어려 있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회학자이자 직장인이면서 시인이라는 그의 독특한 이력은 프란츠 카프카를 연상하게 한다. 법학을 전공하고 보험 회사에서 일하며 노동자들의 삶을 마주한 카프카가 퇴근 후에 사회의 부조리와 개인의 소외에 대한 글을 쓴 것처럼, 심보선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그들을 생각하며 글을 써왔다. 시를 쓰는 그가 사회학을 연구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문학적인 호소로 사회적인 문제를 담론화할 수 있으므로.


잊지 않으리
어젯밤 창밖의 기침 소리


그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를 펼치면 위와 같은 시인의 말을 만날 수 있다. 잊지 않겠다는 저 다짐은 결코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그의 ‘타자되기’를 향한 글쓰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거슬러야 하고 고도로 집중이 필요한 고된 수행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행위를 통해 세계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연대’보다는 이해관계가 없어도 가능한 ‘연결’을 꿈꾼다. 실제로 그는 고공 농성 노동자들에게 목소리로 응원을 전달하자는 ‘소리연대’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그렇게 그는 영혼을 실은 예술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과 우정을 나누기를 꿈꾸고 실행한다. 그의 그를 읽으며 나 역시 고양되어 그 따뜻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며, 영혼을 싣고 우정을 나누는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할지 값진 고민을 해보는 중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온 흐름 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역할은 그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다. 누구는 대담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이 될 필요가 없고 될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짐, 움직임이다. 익명의 바통이다. 그리고 그 바통 위에는 ‘끝나지 않았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책정보 :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글, 문학동네 펴냄


인용한 글 :

1) 〈인중을 긁적거리며〉,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 《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Photo : pixabay.com & @espec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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