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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Sep 02. 2022

호칭의 사회학


한국어는 다양한 어휘를 갖고 있지만 호칭만큼은 부족하기도 하고 부적절한 것도 많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게는 칭찬을 주고받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고민이 되는 것이 호칭이다. 다양한 상황과 관계와 장소에서 경험한, 호칭 때문에 생긴 고민들을 꺼내 본다.




호칭이 가장 일상화된 공간은 회사다. 위계적이지만 직책이 있기 때문에 호칭에 어려움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성에 직책을 붙이면 딱딱한 느낌이고 연이어 발음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친한 팀원분들끼리 이름 한 글자만을 따서 대리님이나 ○과장님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본부장님께 들켜서 혼이 났다.  제멋대로 부르냐고. 그래도 친근함과 습관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본부장님이 실 때만 성을 붙여 부른다.


최근에는 직책을 대신하여 ‘프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회사도 많아졌는데, 그렇다고 모두가 ‘프로’인 것은 아니다. 한자와 영어의 합성어인 ‘책임프로’도 있다. 프로라는 말 자체가 ‘프로페셔널’의 준말일 텐데 책임 있는 전문가와 그렇지 않은 전문가를 나눈 것은 아닐 테고. 어쨌든 그들은 정녕 고양이 책임프로님, 강아지 프로님이라고 굳이 길게 부른단 말인가? 아니면 고 책임 , 강 프로라고 부르는 것인가. 동생은 회사에서 프로라고 불릴 때마다 몸이 꼬인다고 했다.



타 팀 웹사이트 제작 지원을 위해 기획과 디자인을 맡아서 개발자 동료, 그리고 내가 섭외한 외주 작업자까지 세 명이 공동 작업을 했을 때다. 의뢰팀 분께서 회의 중에 제작팀을 지칭하기를 ‘걔네들’이라고 하시는 거였다. 그래서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보았다. 가 그 ‘걔네들’ 중의 대부분입니다만, 고 말씀드리니 몹시 미안해하셨으나 일을 하는 동안 그 호칭 계속 기억에 남았다. 평소에는 우리에게 정중한 분이셨지만, 얼굴을 대면하지 않을 한 사람이 더해지 미지의 대상화가 되면서 호칭에도 리감과 존중의 부재가 생긴 것이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 또한 고민스러웠다. 프리랜서 퍼블리셔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 물으니 이름을 불러도 좋고 편한 대로 하라고 했지만, 그분은 나를 직책으로 부르시니 '님'을 붙였어도 이름을 부르는 게 편하지가 않았다. 퍼블리셔님이라고 했다가 너무 길어서 퍼블님 등 다양한 시도를 해 보았지만 모두 어색하기만 했다. 직업이 영어인 데다가 번역할 말도 마땅히 없으니 이도 저도 애매했다.



미용실에서도 호칭은 어렵다. 원장님이라고 하기엔 ‘미용원’이 아니고, ‘미용실’ 보다는 ‘헤어숍’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실장님도 뭣하고 하여 디자이너님과 선생님 중에 고민하다가 얼버무리기 일쑤다. 음식점에서는 어떤가. ‘여기요’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 같고 '아저씨, 아줌마, 언니, 오빠'는 무례해서 최근에는 직원이든 아니든 ‘사장님’으로 불렀는데, 그 또한 문제가 있다는 걸 책을 읽고 알았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에서 심보선 작가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이 사회에서 저항 없이 정당성을 가지며 확산되는 현상을 고찰했는데, 이 말의 함의가 ‘존중받을 만한 사람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라는 점을 지적했다. 부를 축적하거나 어떤 기관을 대표하거나 사람을 부리는 자가 예우 대상이 되는 사회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가 던진 이 질문을 읽은 뒤로 ‘사장님’이라는 호칭도 이제는 쓰지 못할 것 같다.



결혼을 한 이후에는 불편한 호칭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남편 쪽 호칭이나 명칭은 형님, 아주버님,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 시댁 등 모두 높임말인데 아내 쪽 호칭은 처형, 처제, 제부, 올케, 처가인 것이 마땅하지 않다. 특히 남동생의 배우자를 지칭하는 ‘올케’라는 말의 어원이 싫어서 이름을 불렀더니 엄마 아빠가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올케’가 ‘오라비의 계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아빠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나 또한 형님 아닌 언니이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실지.


병원에서는 노망이나 치매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 건망증 외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열받는다. 그게 뭐든 간에 단어를 바꿔 부르면 화가 난다. 호칭을 바꾼 들 상태가 달라질 리 없다. 고약한 위선이다.


사노 요코는 《사는 게 뭐라고》에서 순화한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저 말도 일리가 있다. 본질을 애써 감추는 것에 화가 나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게 많은 걸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합당한 대우가 되는, 적절한 호칭을 찾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인용한 글 :

1)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글, 문학동네 펴냄

2)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글, 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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