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Sep 14. 2022

기분을 널고 기억을 말리는 일


화창한 휴일 아침이면 나들이를 가고 싶은 생각보다 빨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암막 커튼을 달지 않아 부신 햇살이 이렇게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늦게 눈을 뜬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구름 한 조각의 방해도 없이 들이치는 좋은 볕과 바람이 물러가기 전에 서둘러 빨래를 하기로 한다.


빨래하기를 좋아한다는 건 빨랫감에 물을 묻히고 비누칠을 하고 때를 문질러 없앤 다음 여러 번 헹구는 일련의 행위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번거롭고 힘이 드는지, 한두 가지만 손빨래를 해봐도 어휴 소리가 절로 나온다. 꼬깃하고 꿉꿉했던 직물들이 말끔해진 상태가 되어 상쾌한 향기를 머금은 채 바람에 흔들리며 말라가는 모양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 세탁기의 존재란 얼마나 든든한지.



빨래는 어두운 색과 밝은 색,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소재, 매일 나오는 작은 빨래들과 타월까지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이 중에서 바로 입어야 할 것과 가짓수가 많은 것부터 우선순위를 부여받는다. 선별한 빨래를 넣고 끈적하고 향내 나는 액체를 부어준다. 세탁기를 오래 돌리기를 선호하는 파와 짧은 세탁 시간을 선호하는 파가 있는데, 나는 후자 쪽이다. 전자를 좋아하는 분이 보기 전에 얼른 짧은 코스를 선택한다.


세탁기가 위잉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하면 다음 할 일을 찾는다. 대개는 청소를 한 뒤에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곤 한다. 그러다가 세탁기가 띠로르한 음악으로 할 일을 마쳤다고 알려주면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말끔해진 젖은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서 있는 힘껏 털어서 주름을 펴준다. 그렇게 탁탁 털고 난 빨랫감은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고 간격을 띄워 널어둔다.


이사를 올 때 세탁기를 바꾸면서 의류 건조기까지 살까 고민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건조기는 안 쓰면 후회한다는 가전제품이라고들 하지만 그 신세계를 모르 건조기 놓을 공간을 빨래를 널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가전제품을 가능한 적게 구매하려던 이유도 있었고, 건물에 셀프 빨래방이 있기도 해서였다.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던 빨래방을 아직까지 한 번도 이용하지 않은 채 오며 가며 기웃거리기만 여러 번이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그곳은 늘 개운한 냄새를 머금은 훈풍이 분다. 사람들이 서성일 때도 많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일 때도 누군가의 일주일이었을 세탁물들이 그 흔적을 지우려 쉼 없이 철썩거리며 돌아가고, 다가올 삶을 위한 조각들도 뱅글뱅글 말라간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빨래방보다는 더디더라도 여유 있게 빨래가 마르는 우리 집 베란다가 좋다. 빨래 널기는 귀찮은 집안일 중의 하나였지만 귀찮은 일일수록 서두르지 않고 '나는 이 일에 진심이야!'라는 마음으로 성의를 다해 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걸면 하기 싫던 일도 조금씩 좋아지기도 한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있다. 빨래 하면 생각이 나는 친구 덕분이다.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다르게 빨래 널기에 심이어서 양말 하나하나 손으로 각을 잡은 뒤 짝을 찾아 나란히 널어두었던 친구, 빨래는 이렇게 널고 개는 거라고 관심없는 내게 훈육을 했던 친구. 다섯 살 무렵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라오면서 대학 때까지 인연이 이어진 오랜 친구였는데, 감정이 어긋나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멀어져 버렸다.



서툴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놓아버린 그 친구를 겨우 빨래를 널면서 생각한다는 게 머쓱하지만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빨래를 탁탁 널면서 생각한다. 더불어 미안한 기억도 함께 널어 말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의 그에게 나라는 작은 얼룩이 금세 희미해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친구도 여전히 빨래 널기에 정성을 기울이겠지 하면서.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




인용글 :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글, 위즈덤하우스 펴냄

Photo : 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호칭의 사회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