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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Oct 27. 2022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증명한 삶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을 읽고


산처럼 묘사된 연필과 그 배경 안에 홀로 서서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는 소녀. 상징적인 표지 그림을 한참동안 응시한다.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책장을 들추자니 마음이 무겁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닌 회고록이기에. 또 이 책을 쓰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으므로.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는 독학으로 대학에 입학하여 하버드를 거쳐 케임브리지박사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회고록에는 그가 이룬 성과보다 놀라운 일들이 가득하다. 그가 특수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고, 학교에 다니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탈출해서 스스로 출생 증명을 해야 했으며, 그 후로도 정신적인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든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는 사실지.



타라의 아버지는 종교적 신념과 가부장적 성향이 짙은 사람으로, 산에서 폐철 처리장을 운영하며 정부군 공격 ‘심판의 날’을 대비하고 있었다. 망상으로 가족들에게 “우리의 적이 어떤 자들인지 너희들도 알 권리가 있다”라고 말 것은 심각한 모순이었다. 그는 정보나 권위를 가진 대상과의 교류를 차단하며 '알 권리'를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서 노동 착취하는 과정은 학대와 다름없었다. 학교에 보내지 않고 책도 읽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심각한 교통 사고가 일어나도, 폐철 처리장에서 일하다가 위중한 사고를 당해도 경찰을 부르거나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치료법은 엄마의 민간 요법이 다였다.


학대와 억압은 또 다른 괴물을 만들었고 그 희생양은 어리고 약한 타라였다. 도움을 요청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타라가 제기하는 문제를 무마시키기 위한 가스라이팅까지 더해졌다. 이처럼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말이란 절대적이었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건 추잡하고 배은망덕한 일이었다.



다행히 공부하기 위해 떠난 오빠의 존재 배움의 불씨가 되어 타라도 집을 탈출했지만 아버지의 그늘은 짙었다. 가장 큰 폐해는 도움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란 것이었다. 아파도 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 타라는 통증을 그저 받아들이고, 타인의 친절을 못견뎌했으며 장학금을 받는 일마저 죄스럽게 느꼈다. 여기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졌기에 교육을 선택한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친절을 제외한 어떤 형태의 잔인함도 견뎌 낼 수 있었다. 칭찬은 내게 독과도 같았다. 그것을 마시면 나는 목이 메었다. 나는 교수가 나에게 고함 치기를 원했다.


이랬던 그가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배움에 적응해가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더불어 그를 변화시킨 교육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게 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E. F. 슈마허는 "우리의 임무이자 모든 교육의 임무는 오늘날의 세계,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하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일과 다른 일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오르테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무의미한 비극이나 내면적인 수치, 그 이상의 것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가 자신과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조화롭게 살아갈 힘을 길러준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없으며, 의존적인 삶을 살게 되고 존재 가치를 상실하여 무의미의 늪에 빠져버릴지도 모른다. 타라의 경우를 통해서 이러한 예를 충분히 목도할 수 있었다. 그는 플 땐 약을 먹어야 하고, 자신을 구할 사람은 자신 뿐이라는 친구의 말조차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타라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교육이란 계절의 순환과도 같은 것이어서 반복되기만 할 뿐 성장할 수는 없었다고 묘사했다. 그건 교육이 아니라 편견을 세뇌하고 주입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배움이란 그 과정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가능성을 포함해야 한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 그들의 저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관적 편견이 가미된 주장들을 서로 교환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내가 배운 역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운 역사와 다르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도 틀릴 수 있고, 칼라일이나 매콜리, 트리벨리언 같은 위대한 역사학자들도 틀릴 수 있다.


아버지의 말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타라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죄책감을 품은 자아를 떨쳐내고 쪼개진 자아를 통합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배움의 가치에 눈을 뜬 것이다. 그런 그가 역사기록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가슴 한, 의미 있는 귀결이었다. 타라가 유연한 배움을 지속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하면서 루소의 말로 글을 마친다.


우리의 능력과 신체 조직을 내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자연의 교육이다. 이러한 성장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인간의 교육이다.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물체들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얻는 것은 사물의 교육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마다 세 가지 종류의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는다. 만약 세 가지 교육의 다양한 가르침이 제자의 내면에서 서로 모순된다면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존재, 자기 자신과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책 정보 : 《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글, 김희정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인용한 책 :

1) 《작은 것이 아름답다》 E. F. 슈마허 글, 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2) 《에밀》 장 자크 루소 글, 박호성 옮김, 책세상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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