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무난하게 노년에 접어든 남자가 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삶과 인격을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다. 'The Sence of Ending'이라는 원제는 '결말의 의미' 정도의 뜻이 아닐까 싶은데, 제목 의역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상하게 임팩트가 느껴지는 제목이긴 하다. (※스포일러 포함)
토니 웹스터는 말년의 어느 날 날아든 유언장을 시작으로, 자신의 기억이 왜곡되고 미화되었음을 알게 된다. 젊은 날의 토니는 상처받기 싫어하고 자기 방어적이었다. 토니의 친구 에이드리언과 연인이었던 베로니카가 만남을 고백하자 토니는 ‘공동의 윤리적 가책’에 대해 정중하게 설명하고 행운을 빌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기에 자신의 기억은 의심할 여지없이 견고하다. 그래서 살아온 세월을 무기로 휘두르고 편견이 담긴 신념을 방패 삼게 된다. 그러나 자신만 모르는 사실은, 스스로의 기억이란 주인공의 시점으로 편집했다는 사실이다.
에이드리언의 일기는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에서 끝난다. 뒷부분은 ‘만약 토니가 사라를 만나보라고 하지 않았어도 사라와의 관계가 지금과 같았을까?’라는 맥락의 질문이며, 그렇다는 답을 얻었기에 에이드리언은 책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자살을 했을 거라고 추측해본다.
에이드리언의 결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그의 자살과 아들의 장애는 사라와 에이드리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베로니카는 토니에게도 책임을 묻기 위해 토니가 등장하는 일기의 부분만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불행을 책임질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의 한 문장이다. 이 책을 읽고 토론한 결과 의견이 분분했다. 토니는 잘못이 없다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고 토니 같은 인물을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 이야기에서 토니의 행동이 어떤 일의 원인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토니는 베로니카를 잘 모르는 채 멋대로 판단했으며, 예의나 윤리의식이 없었다.
과거의 잘못을 인지한 후에도 토니는 명예를 회복할 욕심에 베로니카에게 다시 상처를 준다. 모든 일이 벌어졌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명예 회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또한 토니의 부족함이다. 진실을 알려는 노력 없이 사면받기를 바랐으니까.
때로는 감정의 작은 찌꺼기까지 털어버리기 위해 사람들은 타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신 또는 악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토니에게 에이드리언은 천재(신)였지만, 베로니카는 비밀에 쌓여 있는 악녀이자 친구와 정분이 난 문제적 이성이었다.
어릴 적 토니에게는 롭슨의 자살도 가십거리였다.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 단순히 한 가지 이유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삶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면, 우리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무게들이 그를 짓눌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납득하고 싶은 하나의 이유로 타인의 죽음을 단정지어 버린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적어도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이 이야기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삶은 거대하고 인간은 무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져야 하며 좀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신념이라고 믿고 있지만 편견은 아닌지, 내 마음 편하자고 타인을 멋대로 규정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데미안》에서 읽은 문장을 소환하며 감상을 마친다.
우리가 대단한 창조자이며,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쉴 새 없이
이 세상의 끊임없는 창조에 관여하고 있는가
책 정보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글, 최세희 번역, 다산책방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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