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작품 중에서도 근대소설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주목 받은 작품이었던 《천변풍경》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민들의 이야기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파노라마적 트리비얼리즘(!) 등 온갖 -ism이 거론되는 난해한 작품 해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내가 소화한 나의 언어로 정리하니 속이 편했다.
1930년대의 시대 풍속과 가치관
먼저 1930년대가 부르주아들의 등장으로 자본주의 질서와 근대 생활양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임을 감안하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기존의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상황을 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문학계에서도 다양한 문예 사조가 등장하고 여러 사상성이 공존했다. 그중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손꼽힌다. 이 작품에서 박태원 자신이 투영된듯한 인물 ‘구보’는 화려하지만 속물적인 도시의 산책자다. 《천변풍경》에서도 그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식민 치하 도시 속 이웃들의 어려운 처지를 들여다본다.
공간 배경, ‘도시’와 '빨래터'라는 장소성
도시는 사람들의 욕망이 집결하는 곳이다. 동시에 ‘무지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파락호들의 밥이 되는’ 비정한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기에 낙향은 곧 실패와 절망이다.
하천도 이용료를 내는 자본주의적 공간이 되긴 했지만, ‘빨래터’와 ‘이발소’는 ‘광장’을 대신하여 소문이 모이고 퍼지며 여론이 형성되는 장소다.
삶의 태도와 욕망으로 본 인물 구분
만돌어미, 창수아비, 금순이를 데려온 사나이, 금순의 시아버지는 도시의 자본을 동경한다. 손주사나 창수는 도시의 외로움과 비정함을 경험했으며, 신전집처럼 실패하고 낙향한 자도 있다.
하나꼬와 이쁜어미는 안정된 결혼을 추구하고 민주사, 강가, 만돌아비는 여러 이성을 욕망한다. 특히 민주사는 권력욕에서 좌절하고 애정 문제 때문에 우울해도 ‘돈’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자본주의적인 인물이다.
한약국집은 부르주아 계층의 표상으로, 인물들의 욕망을 실현한 타자로서만 등장한다. 한약국집 며느리는 시집살이 없는 시댁에서 남편과도 화목하게 살고 있다. 이들이 등장하는 절 제목이 <행복> 그리고 <평화>라는 것에 다른 인물들의 삶이 한층 서글프게 느껴진다.
여성상의 변화와 한계
박태원의 작품에는 직업 여성이 등장한다. 카페 여급은 경제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다. 기미꼬는 약자인 여성끼리의 연대를 주도하는 탈이데올로기적 인물인데, ‘협기’ 기질이 형성된 과정이 생략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점룡어멈의 대사 “어려운 집 딸자식은 그저 파닥지나 추하지 않으면 소리나 가르쳐서 기생으루 내놓는 것밖엔…”에서 보듯 여성의 상품화와 인권 의식은 나아진 바가 없다.
소설 속 여성들이 약자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결혼 풍속에 있다. 이쁜이나 하나꼬의 경우에서 보듯 여성에게 결혼은 익숙한 공간과 관계의 단절이다.
소설의 형식과 재미 요소
소설은 희극적인 문체로 많은 인물들과 갈등 상황을 묘사한다. 인물들의 사연은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소문과 뒷말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또한 소설 중간에 서술자가 등장하여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한다.
박태원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쉼표다. 그는 쉼표를 자주 사용하여 문장의 맛을 살리고 독자의 호흡을 주도한다. 열 쪽짜리 단편 소설 <방란장 주인>에서는 한 문장이 모두 쉼표로 연결되고 심지어 쉼표로 끝난다. 이와 같은 신선한 형식은 이야기를 글이 아닌 ‘말’로 전하는 듯한 효과와 재미를 준다.
관찰자 시점의 변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는 산책자이며 관찰자로서 도시를 탐구한다. ‘구보’가 자신과 도시의 관계를 탐색하는 외로운 예술가였다면, 《천변풍경》의 재봉이와 서술자는 도시 속 사람들의 생활과 가치관을 관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재봉이가 은근히 바라던 대로 포목전 주인의 중산모는 개천 물에 빠져버리고, 천변 주민들은 어느 정도 안정감 있는 삶으로 진입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천변풍경》에는 이처럼 부르주아를 풍자하고 군중을 연민하는 작가의 사상과 더불어 예술과 인간을 탐구하는 작가의식의 변화가 담겨 있다. 이 두 작품 이후로 박태원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궁금해진다.
책 정보 : 《천변풍경》 박태원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함께 읽은 책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