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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r 22. 2022

길고 고단한 밤, 그리고 '우리'라는 기적

《긴긴밤》을 읽고


광활한 자연을 고운 색감으로 그린 삽화와 함께 야생동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났다. 그러나 아름다운 배경과는 달리 등장인물들이 겪게 되는 상황은 험난하기만 하다. 많은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모험을 떠난 것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코뿔소와 펭귄들도 무언가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이 책은 그들이 '함께' 찾아 나선 그 ‘무엇’과 그 과정에서 지녀야 할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의 화자는 이름이 없다. 펭귄 무리에서 버려진 알을 치쿠와 윔보라는 두 아빠가 품어 주었으며, 그가 태어났을 때는 코뿔소 노든만이 곁에 있었다. 노든 역시 부모 없이 코끼리 보호소에서 자랐다. 화자와 노든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맥락을 알지 못한 채 연약한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다.


의식을 가진 생명체는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시기를 겪는다. 노든이 코끼리 무리에 남을지 떠날지 결정해야 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도 온다.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노든이 훌륭한 코끼리이자 코뿔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리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뿔소라는 정체성이 성립되었기에 '어떤' 코뿔소가 될 것인지 고민할 수 있었다.



세상 밖으로 나간 노든은 가정을 이루는 기쁨을 맛보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들의 사냥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동물원에 갇히고, 어렵게 마음을 나눈 앙가부는 전쟁으로 희생된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아 동행하던 치쿠마저 죽는다. 삶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존재하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검은 길’처럼 고단한 과정이다. 노든과 친구들이 견딘 ‘긴긴밤’은 의 다른 이름이다. 정희진 작가는 삶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했다.


삶이란 나는 남고
내게 의미 있는 관계자들은 떠나는 과정이다



그런데 때때로 기적이 찾아오기도 한다. 노든을 인정하고 용기를 준 코끼리들, 사랑을 나눈 가족들, 함께 탈출을 꿈꾸던 앙가부, 서로의 불편함을 살펴준 치쿠와 윔보처럼. 윔보를 잃고도 유쾌함을 잃지 않은 치쿠는 노든에게 포기하지 않는 법과 마음을 다해 지켜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침을 남긴다. 그리하여 노든은 다시 혼자가 된 후에도 알을 지켜내고 바다를 찾는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노든에게 남겨진 것은 삶의 고단함을 함께 이겨내고자 했던 이들의 의지와 태도였다. 코끼리들이 전해준 격려와 애정, 앙가부나눈 우정, 치쿠와 윔보의 헌신... 그들의 유산은 노든을 통해 이름 없는 펭귄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들과 연대했던 경험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 때에도 혼자 나아갈 힘이 되어 준다.


소설 속 화자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이것이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과제를 짊어지고 있으나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기에, 연민의 마음으로 함께 나아갈 때 삶은 보다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이 책은 전하고 있다.




책 정보 : 《긴긴밤》 루리 글, 문학동네 펴냄

함께 읽은 책 :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글, 교양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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