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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un 15. 2023

낯선 전화번호와 도어록 비밀번호

선의와 불안이 빚은 거북스러움


저기, 아이고 잠깐만 나 좀 도와줘요!


주택가를 지나던 중에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 지긋하신 할머니께서 난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신 것이었다. 숫자만 좀 눌러 달라며 그 집 현관으로 이끌리는 사이, 내 안에서는 의와 불안스물 섞이고 있었다. 도어록의 숫자가 안보이셔서 그런 거겠지, 며 걱정을 삼켰는데.


"아들 전화번호인데, 생각이 안 나."

"전화를 놓고 나왔는데, 문이 잠겼어."


.. 난감한 일이다. 침착하자고 다짐하고 기억나는 번호가 있는지 여쭈었다. "7.. 7301에 5042 아니 5034였나..?" 세 번호 다 아니었다. 물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번호 맞지 않더니 급기야 도어록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쯤 되니 그 집이 할머니 댁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셨는데 TV 소리가 시끄럽게 새어 나왔고,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구냐고 호통이 내려칠 것만 같았다.



도어록이 반응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겨우 살아난 키패드를 재차 눌러보니 경보음이 울렸다. 흐아, 이 일을 어찌 해결하나... 아들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애매한 번호로 걸 용기도 안 나고, 내 번호를 노출하고 싶지 않은데...  집에 빨리 가고 싶었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고 다짐했다.


"할머니, 아드님 전화번호 아세요?"

"으응, 공일공에 칠삼공하나에 오공삼사여."


뭐지... 이 거침없는 숫자는? 기억이 잘 안 나신다고 했는데? 의구심을 안고 도어록 키패드를 눌러봤지만 역시나 맞지 않았고 이어지는 경보음 그리고 먹통. 결국 전화를 걸 스피커 기능을 켜서 할머니가 직접 통화하시도록 해드렸다. 대화를 들어보니 오오, 번호가 맞았다! 하지만 아들은 비밀번호를 왜 또 묻느냐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전화만은 걸기 싫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할머니의 눈에 퍼런 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친 목소리가 "문도 못 여는데 도와줄 사람을 그냥 보내면 어쩌냐"고 할머니를 다그치기에 결국, "저, 여기 있어요! 번호 말씀해 주시면 제가 열어 드릴 게요."라고 말고, 휴대폰 번호 네 자리에 00을 붙인 여섯 자리 번호를 듣고 전화를 끊었다.


"뽁뽁뽁뽁뽁뽁 삐리릭~"

열렸다! 다행이었다! 그 집은 할머니의 집이 맞았고,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셨고, 기억력도 문제가 없으셨으며, 나 이제 우리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좋아라 하시며 서둘러 가려는 나에게 "들어와, 놀다가!"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어후 아니라고 얼른 들어가시라고 했더니 다음에 꼭 놀러 오라고 당부하신다.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던 찰나에 조금 전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시기에 잘 들어가셨다고 했더니 죄송하다, 고맙다고 하는데 여전히 말투는 투박했고... 멍 하나와 말투가 조합이 되니 설마 하는 생각들이 번져간다. 괜한 의심일 수도 있고 무심한 외면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낯선 이를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하는 도시의 생태가 싫었는데, 내 안전에 대해서는 별 수 없는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몰아보는 요즘이어서 그럴까? 내 전화번호와 목소리까지 노출되었고 내가 그 집 비밀번호를 알게 됐다는 사실에 다시 초조해지고 말았다. 내가 어떤 무서운 인물에게 타깃이 된 것만 같은 불안감.  글도 찾아낼 것만 같은 두려움. 놀러 오라던 정감 어린 할머니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 불안을 어쩌면 좋은지. 가족들 말대로 번거롭고 오래 걸릴지언정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할 걸 그랬나? 아,  모든 게 이고 씨에게 배운 설적 상상력이기를.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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