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쓴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김현경 작가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사회 속 구성원의 특성과 성원으로 인정받는 조건에 대해 심도 깊게 고찰한다. 김현경의 해석과 번역가의 해제가 충분히 제공되어 있지만, 이 책을 아끼는 독자로서 나름대로 해석한 서평을 적어 본다.
페터 슐레밀은 양심적인 행동의 댓가로 재산을 모두 잃고 절망하고 위축되어 있다. 청탁을 하기 위해 부자를 찾아간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데, 회색 옷을 입은 자가 나타나 마술 돈자루와 슐레밀의 그림자를 바꾸자고 제안한다. 슐레밀은 꺼림칙한 기분에 회색 남자를 나무라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인다.
슐레밀은 단번에 부유해졌지만 그림자 없는 삶은 고통스럽다. 그를 존중하던 사람들은 그림자의 부재를 알고 나면 경멸을 보이고, ‘성실한 사람은 그림자를 간직하는 법’이라고 충고하며 슐레밀을 피한다. 충실한 하인을 고용해서 비밀을 숨겨 보아도 모든 게 밝혀지고 슐레밀은 고립된다. 회색 남자는 다시 그림자와 영혼을 맞바꾸자고 제안하지만, 슐레밀은 이를 거절한 뒤 마술 신발을 획득하여 자연을 탐구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다.
이 노벨레는 파우스트와도 유사하고 어디선 들어본 전래동화 같기도 해서 독창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출판 상태도 서술어에 통일성이 없이 어색한 부분이 있고 오타도 많아 만듦새가 허술하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놓지 못하는 건 왜인지, 그리고 전문가들이 밝힌 견해 외에 이 이야기를 어떤 알레고리로 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두 연구자의 해석을 종합해 보면 그림자는 1) 처음엔 누구에게나 부여되고 2) 있을 때는 무가치하게 생각되지만 3) 없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그 무엇이다. 그림자를 잃은 자는 집단 기억을 상실했거나 정상 시민 자격이 박탈될 만한 오명(스티그마)을 가진 자, 낙인이 찍힌 자다. 신체적 의미의 은유로써 '코가 없는 사람(김현경)'으로 비유되기도 하고 추상적인 은유로써 '조국, 민족, 가족, 명예, 평판 등을 잃어버린 자(열림원 해제)'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림자를 잃은 슐레밀은 차별받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는 간절히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었고 약간의 명예를 원한 것이었을 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몹시 혐오한다. 그가 맺은 부당한 거래가 아니라 그림자의 부재, 즉 그의 외형 때문이다.
회색 남자 역시 유혹을 미끼로 거래를 제안했을 뿐, 무력을 사용하거나 절대악을 행하기는커녕 늘 정중한 존댓말과 몸짓으로 슐레밀을 대했다. 슐레밀을 절망하게 한 대상은 그 자신과 회색 남자와 더불어 그를 호의로 대했다가 냉정하게 돌아선 사람들이었고, 악한 것은 슐레밀의 약점을 이용한 라스칼과 같은 사람이었다.
저는 보잘것없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리 악하진 않습니다. 어제 당신은 저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오늘 당신에게 그 점을 추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해제에서는 지은이 샤미소가 프랑스에서 망명한 독일인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그림자를 잃은 것이 경계인, 이방인, 이민자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았다. 그러나 샤미소는 프랑스에 다시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독일을 택했고, 활발하게 교류하던 예술가 동료들이 있었다. 책의 서문을 통해 샤미소와 친구들의 위트 있는 유대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의식에는 조국 상실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로 인해서든 누구나 크고 작은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상실이 간절히 감추고 싶지만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삶은 어떠할까? 신체의 일부가 없거나 불편한 경우, 피부색과 말투가 다르거나 영화 〈기생충〉에서처럼 가난의 냄새를 숨길 수 없다면.
더 확장해 보면 눈에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만 관계가 가까워져도 쉽게 노출되는 부재나 상실도 무수히 많다. 부모가 없거나, 이혼을 했거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다름 등을 정상성의 상실로 인식하여 편견의 시선이 쏟아진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만을 원하는 인정 욕구는 사회 인식에 가로막히고, 상실을 받아들이기도 벅찰 이들은 낙인과 배제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나는 나 자신과 화해했지만, 처음에는 필연성을 받아들일 것을 배웠지. 이미 벌어진 행위, 일어난 사건이란 필연성에 의한 것일 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는가! 나는 필연성을 현명한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지.
이 책에서는 슐레밀이 결국 그림자도 돈도 포기하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의 삶마저 포기한 채 자연을 탐구하는 삶을 택한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개척한 슐레밀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낙인과 혐오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이야기가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이토록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 정보 :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최문규 옮김, 열림원 펴냄
함께 읽은 책 :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문학과지성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