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는 확실히 독보적인 인물이다. 누군가의 아들의 아들들이 무력과 자신감을 뽐내다가 사라지는 동안 그는 스스로의 지략과 통솔력으로 승리를 이끈다. 그는 10년 동안 트로이 전쟁을 치른 뒤 귀향길에 올라 10년을 더 방황하면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 된다. 귀향길이 험난했던 이유는 그가 포세이돈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는데, 전쟁의 신이자 지혜의 신인 아테나가 자신을 닮은 오디세우스를 돕는다. 그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섬에 다다른다. (※ 결말 내용 포함 주의)
매들린 밀러는 왜 키르케의 이야기를 다시 써야만 했을까. 신이나 영웅만을 주목해온 나와 같은 독자 때문이다. 《키르케》를 읽으면서 오디세우스가 언제쯤 등장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질지 내심 기대했는데, 그는 255쪽에서야 등장한다. 사실 그는 키르케의 생애에서 단 1년을 함께 했을 뿐이다. 귀향한 이후 오디세우스는 은퇴한 자가 그러하듯 우울과 무기력으로 괴팍하게 변해버리고 아들과 갈등을 빚는다.
오디세우스가 모험에서 만나 특별한 정을 나눈 여성이라면 칼립소와 나우시카도 있다. 그중에서도 매들린 밀러가 키르케를 선택한 이유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대 인식과 맞닿아 있다. 칼립소는 아름다운 요정이고 나우시카는 현명한 공주다. 반면 키르케는 하급 요정이자 마녀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 아름답거나 친절하지 않은 여성은 나쁜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했다. 현대 이전 문학에서도 여성은 대부분 보조적인 인물로 머물러왔다.
매들린 밀러는 키르케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그러나 이것이 이 책의 주제는 아니다. 그는 그동안 서사시에서 다뤘던 올림포스 주신들과 영웅들 뒤편에 가려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명함으로써 그들의 존재 의미를 일깨운다. 영웅들만 가졌던 서사를 키르케와 텔레마코스에게 부여하고, 그들에게 없는 것들로 인해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영웅과 신들의 위대함마저 깨부순다.
막강한 신들은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능력을 타고났기에 결핍이 없고, 그래서 성찰도 없다. 신들은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행동을 지켜보며 분노하거나 즐거워하고, 때때로 자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도울 뿐이다. 반면 키르케가 가진 마법은 절망을 양분 삼아 키운 능력이었다. 키르케는 외로움이 지속될 거라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인간들의 죽음을 축복처럼 느낀다. 그렇게 그는 인간을 이해하고 연민을 품게 된다.
신들은 이코르와 넥타르의 산물이라 탁월함이 이미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며 명성을 쌓았다. 도시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역병과 괴물을 낳고.
키르케는 유일하게 회한에 사무친 신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 스킬라를 보며 한때의 어리석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신족이 상심하면 육신을 버리고 자연물로 살아가기도 한다지만, 키르케는 삶을 버리기보다는 번뇌하며 나아가는 쪽을 택한다. 비슷한 상처를 지닌 키르케와 텔레마코스이기에 그들의 동행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책은 그동안 신화와 영웅 서사시가 창조한 이미지를 전복함으로써 재미와 의미를 생성한다. 《오디세이아》에서는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극존칭을 하며 시중을 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키르케》에서는 반대 입장이다. 신들은 영생을 누리지만 그것은 곧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며, 신들이 인간에게 부모처럼 굴지만 사실은 어린애라는 키르케의 판단까지도 그렇다. 영웅의 말로가 초라했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하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신들의 세계를 통해 성찰 없는 삶에는 욕망과 힘겨루기, 가벼운 장난뿐이라는 사실을 읽는다. 약점과 한계라고 생각했던 인간적인 면모들이 다른 관점에서는 희망이라는 사실도 배운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아도 제 삶에 충실하다면 충분하다는 깨우침도 얻는다. 이은선 번역가는 신들을 일컬어 ‘고인 물’이라고 표현했다. 신이든 인간이든, 썩지 않으려면 존재는 성찰과 성장이 필요하다.
책 정보 : 《키르케》 매들린 밀러, 이은선 옮김, 이봄 펴냄
함께 읽은 책 :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원작, 아우구스테 레히너 풀어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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