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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Apr 30. 2022

비를 피할 때부터 난 어른이었던 걸까

리사 아이사토, 《삶의 모든 색》을 읽고


그림책을 좋아하는 동료가 불쑥, 커다랗고 두꺼운 그림책을 들이민다.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이라는 무언의 약속임을 알기에 경건하게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바로 넘기고 싶지만, 먼저 그림책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표지부터 찬찬히 관찰한다.


짙은 비구름이 깔려 하늘인지 물인지 구별되지 않는 공간. 두 아이가 알몸을 하고서 내리는 비를  벌려 환영하고 있다. 색색깔로 내리는 비는 아이들의 주변에 동그란 파장을 만든다. 어두컴컴한 주변도 아랑곳지 않고 자연을 만끽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몸은 자체 발광하고 있다.


《삶의 모든 색》은 여섯 개의 제목으로 구분되어 있다. 아이의 삶, 소년의 삶, 자기의 삶, 부모의 삶, 어른의 삶 그리고 기나긴 삶이 그것이다. 대체로 한쪽 지면을 그림이, 맞은편을 한 줄 텍스트와 여백이 장악한다. 문체는 간결하고 고요하며 다정하다. 나머지 이야기를 담당하는 그림은 사실적인 일러스트에 수채화처럼 번진 기법이 눈에 띄고, 다양성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림책의 그림은 보는 게 아니라 읽어야 한다. 〈아이의 삶〉에서 아이들은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해바라기 밭에서 활짝 핀 꽃을 한 아름 안고 서 있거나, 바람을 맞으며 민들레 언덕을 뛰어논 뒤 '진액'처럼 끈끈한 땀에 엉긴 채 단잠을 자거나, 혹은 파르랗게 얼어붙은 추위에도 빨개진 볼을 하고 두 손에 눈을 받아 드는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름날 빗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놀았는지 기억하나요?


책 속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비를 부러 맞으며 키득댔던 기억이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여름날은 고사하고 비를 맞은 기억이 하나뿐이라니, 허약하고 가난해서 서글퍼진다. 조금 더 확장해서 묻기로 한다. 어린 시절에 어떻게 놀았는지 떠올려보자고.


어릴 적에는 그저 철없이 놀았다. 철이란 '시기'나 '계절'을 의미하므로 시간도 모르고 날씨도 상관하지 않고 놀았다는 뜻이다. 도시에서 자랐어도 놀기에만 빠졌던 기억은 화단을 파고, 모래를 소꿉 살림으로 곱게 고르고, 네 잎 클로버를 찾거나 병아리를 관찰하는 것처럼 자연과 함께 했던 장면들이다.


내리는 비를 피하면서부터 어른이 되었나. 비 오는 날 동생들보다 먼저 멀쩡하고 예쁜 우산을 고르고 싶었던 때부터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도 〈소년의 삶〉에는 자연이 물러나고 내면이 자라난다. 어른들의 걱정과 스스로의 고민이 시작되고 소년들은 그런 혼란을 거친 외모로, 깊어진 눈동자로 표현한다. 그렇게 소년들은 〈자기의 삶〉 입구에 선다.



삶의 길목마다 각기 다른 빛나는 순간과 어둠, 희망과 절망이 존재한다. 그 굴곡을 따라 다양한 색으로 채워진 배경 속에서 가볍고 무거워지는 인물들의 표정은 삶의 기억 곳곳에 있는 나의 얼굴이자 남편과 부모, 우리 아이의 얼굴이다. 〈자기부모 그리고  삶은 지금의 내 모습과 닮아 있다. 그리고 아직 닿지 않은 〈기나긴 삶〉에 이르러서야 이 텍스트를 만난 것에 마음이 아릿하다.


마침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할 시간이 생겼어요.

〈기나긴 삶〉의 마지막은 아이의 삶에 이어 두 번째로 반복되는 '당신이 ○○○○○고 느꼈으면 좋겠어요.'라는 문장이다. 책에서는 다른 단어가 채우고 있지만, 저 빈칸에 원하는 단어를 넣으면 된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선택한 그 단어를 지침 삼아 매일을 산다면 우리 삶은 지나간 기억마저도 구석구석 총천연색으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책 정보 : 《삶의 모든 색》 리사 아이사토, 김지은 옮김, 길벗어린이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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