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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un 07. 2022

좋은 문장은 젖은 머리에서 나온다

글의 제목 짓기


책상 앞에서 발상이 떠오르면 좋으련만, 머리를 감으려고 머리카락을 물에 적신 순간마다 하필 그럴듯한 문장이 떠오른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도 아니니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기도 뭣하고, 되도록이면 휴대폰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려는 습관도 있어서 이런 상황이 종종 발생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닌가보다. 메모할 수 없는 상황이어야 발상이 떠오르는 것이니,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도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꽤 괜찮은 인식이나 표현이었다고 뿌듯해하다 보면 그전까지 내내 생각했고 잊지 않을 것 같던, 그럭저럭 괜찮았던 발상을 지워버린다. 이 글의 제목도 머리를 감는 동안 잊은 문장을 아쉬워하다 생각했다. 몇 발자국 진도까지 나간 그 문장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면 진정 안타다. 고심 끝에 집 나갔던 문장들이 돌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서 그네들을 붙들고 다시는 날아가지 않도록 어딘가에 꼭꼭 적어 놓는다.




좋은 문장은 때때로 좋은 제목이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제목을 먼저 지어 놓고 글을 쓰는 경우가 있고, 글을 다 쓴 다음에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을 뽑아 제목으로 쓰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제목의 힘이 글을 끌고 가면서 수월하게 진행되기는 하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슴슴한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다. 반면에 후자와 같은 방식의 글쓰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제목과 내용의 유기성이 전자보다는 탄탄하다.



후자의 방식은 장강명 작가의 《책이 뭐라고》에서 일부분 배웠다. 《책이 뭐라고》는 장 작가의 독서 생활을 담은 산문집으로, 말하고 듣는 인간과 읽고 쓰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지 관찰하고 탐구하는 책이다. 읽고 쓰는 인간으로서 살아온 이야기와 함께, 읽고 쓰는 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찰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세탁실의 배수구와 바둑 기사들의 전성기〉처럼 낯선 소재를 나열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는 작명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적어도 서너 페이지에 한 번쯤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가, 그 자체가 목적인 아름다운 문장들 때문에 멈추는 일이 벌어져야 소설은 ‘콘텐츠’가 아니라 ‘예술’이 된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내 마음속 또 다른 글 선생님으로 자리한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다. 이 말은 어떤 문장이 아름다울 수 있으려면 홀로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여 있어야만 그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좋은 문장 하나로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나는, 이 글이 소설아니고 분량도 부족하지만, 고작 제목 하나를 지어놓고 ‘콘텐츠’를 넘어 ‘예술’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된다.



창조는 모방이 낳는다고 했으니, 예술 흉내를 내다가 넘어지면 콘텐츠라도 되겠지. 아니, 그건 너무 무책임하다. 어딘가 좀 허전하고 슴슴한 이 글을 나쁘지 않은 하나의 글로 완성하기 위해 분투해 보자. 시간을 두고 읽어 보고 보태 보자. 이 막막함이 어쩐지 좋다. 누구에게도 댓가를 받지 않았고 나 자신과 잘 타협하면 되니까. 그러다 실패한다 해도 나 혼자 잠시 , 그리고 다시 쓰면 되니까.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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