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벌처럼 나와 우울의 상리공생을 찾다.
새벽녘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면 우울은 소리소문 없이 곁에 드러누워 나를 뒤흔들었다. 밤이면 그나마의 세로토닌도 모두 잠들어 버리는 탓일까?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해 버릴 때면 도파민을 깨워서라도 그 시간을 버텨야 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눈에 잡히는데로 보다보면 눈이 가슬가슬해지고 핸드폰은 손에서 뚝뚝 떨어진다. 우울의 대표적인 현상, 불면증을 몇 년째 겪었다. 서너 시간을 자도 낮잠을 자지 않았고 그마저도 자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새울 때가 많았다. 몇 년을 지속했으니 불면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잠에 취한 상태로 지냈다.
아마 없던 우울이 급성으로 생겨나진 않았을 테다. 자살사고도 신체화도 워낙 많이 겪었던 일들이었다. 우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완 마비형 자가 면역 질환이나 나 하나 사라져도 괜찮을것인란 낮은 자존감으로 기인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괜찮은 척 행복한 척하고 살았던 이유는 단 하나, 전시할 가치가 없는 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것이란 불안 때문이었다. 나에게 가장 큰 핵심 불안은 바로 유기 불안이었다.
약을 먹어 해결할 문제가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면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 나를 살렸다. 우울증의 가장 큰 치료제는 운동과 글쓰기라는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나로 인해 증명된 것이다. 여전히 우울을 경험하고 있지만 희로애락의 일부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가벼운 우울은 나의 영역과 경계를 바로 잡아 주었고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시기하게 하는 대신 지금 내가 가진 삶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포기하고 누군가의 삶을 산다면 과연 나는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내 삶을 감사히 여길 수 있는 겸손함과, 누군가의 행복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을 선물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처럼 삶 속에 진진하게 피어 있을 때, 벌처럼 날아들 우울은 나의 시기, 불안, 분노라는 꽃가루 위로 무겁게 내려 앉아 그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진짜 나의 속마음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 우울은 아직 잘 모르는 나를 소개하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는 소중한 단서이자, 신호, 나침반이다.
앞으로 남은 내 모든 날들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우울의 무게가 아직 64로 존재하지만 없애고 치료해야 하는 병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소중한 일부임을 받아들인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