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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Nov 01. 2024

옥수수

다음 여름까지 옥수수 고개를 넘어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사랑받는 간식은 찐 옥수수다. 무더운 여름 주말이면 사장님은 성당 앞에 파란색 1톤 트럭을 주차하고 커다란 압력솥으로 쉴 새 없이 옥수수를 쪄냈다. 동네 사람들은 빨간 가스 불 열기와 여름 뙤약볕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초당 옥수수

 여름 주말에만 맛볼 수 있던 구황작물은 이년 전부터 아주 추운 겨울을 제외하면 먹을 수 있는 별미가 되었다. 세 계절 옥수수고개를 넘었던 동네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사장님이 아파트 상가 1층에 입점하게 된 것이다. 위치가 얼마나 좋은 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성당 맞은편 횡단보도 앞 테라스 매장에 자리를 잡았다. 전후방 1미터 이내로 퍼지는 옥수수의 유혹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오늘도 홀린 듯 김이 오르는 찜기 앞에서 노란 옥수수 두 봉지를 손에 들었다.


 나는 옥수수를 싫어했다. 기능성 소화불량이란 병명으로 힘든 내 밥주머니는 섬유질이 풍부한 옥수수만 먹으면 운동을 멈췄다. 덧니 많은 내 이빨 사이사이 끼이는 식이 섬유도 곤욕이었고. 게다가 터질 듯한 압력솥에서 방금 나온 작물이 한 김 식을 새 없이 비닐봉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 먹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집사람들 성화에 못 이겨 가끔 유리 용기를 들고나가 사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 못 들은 책하고 살았다.


 그런 내게 옥수수의 세계를 열어 준 친구가 있다. 도서관에서 함께 사서 봉사를 하는 짝꿍. 여낙낙한 눈빛이 매력적인 언니다.

“서영,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 그러니까 네가 그때 화내지 않고 그 사람의 강한 에너지와 충돌하지 않고 참은 건 정말 잘한 거야!”

한강에서 뺨 맞고 언니에게 분풀이를 하면 보드랍게 달래 주는 따뜻한 사람. 옥수수를 무척 좋아하는 언니와 일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따라갔다가 처음으로 구황작물을 두 봉 샀다. 그리고 그날 앉은자리에서 두 개를 해치웠다.


 따끈한 옥수수의 독특한 식감은 맛은 물론 스트레스까지 날려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홀린 듯 찜기 앞에 서 있곤 했다. 아이들 간식으로, 나의 끼니로 자주 식탁에 올라온 옥수수는 물론 하루 밤을 넘기지 못하고 금세 사라졌다. 고요한 집에서 달큼한 향을 음미하며 베어 물면 탱글탱글 한 알맹이가 차지게 터지는 옥수수는 내 피와 살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옥수수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데 가게 안쪽으로 상자가 보였다. “Freezing instantly in boiled corn”라는 영어 문구와 함께 ‘Made in China’가 적혀 있는 상자. 제철에만 만날 수 있을 때 사장님은 하얀색 천 위에 빨간색으로 “국내산 찰옥수수”라고 적힌 현수막을 붙여 놓으셨는데. 하긴 이제 막 찬바람 가신 초봄에 옥수수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아버지가 농사 지은 토종 옥수수

 농부의 딸이 된 내게 중국산 옥수수는 일생일대 중요한 문제다. 옥수수 두 봉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가는 길, 부모님 댁 여름 풍경이 떠올랐다. 매년 여름이면 풍년인 옥수수. 부모님 동네 분들은 도매로 팔고도 남는 옥수수를 몇 자루씩 이웃에게 나눠주고 그래도 남는 건 다시 땅에 묻어 버린다. 우리나라는 왜 중국처럼 미리 삶아서 얼려놓지 않는 걸까? 아마도 돈 때문이겠지? 문득 어마어마한 인구와 거대한 대륙을 가진 중국의 위력이 느껴졌다. 식량 주권은 이렇게 넘어가게 되는 걸까?


 집에 오면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인 아이들 간식으로 옥수수는 정답이었다. 빵, 아이스크림, 젤리, 사탕 등 탄수화물의 다른 명사는 간식으로 준비할 때마다 매번 번뇌했으니까. 아무리 유기농 빵을 찾아도 그것은 밀가루와 설탕, 지방 덩어리에 불과하다. 영양 과잉시대. 그런 면에서 사시 삼철 옥수수는 내게 구세주가 되어주었는데.


중국산 옥수수는 어쩐지 내 삶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몇 년째 우리 토종 종자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있고, 되도록 생협을 이용하며 부모님에게도 유기농법을 강권하는 나니까.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간식이지만 제철이 아니면 백해무익이다. 제 때에 열심히 먹고 다음 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그럼 매년 만나는 옥수수가 더없이 반가울 테니까. 나 하나 안 먹는다고 타격감이 있겠냐만은 삶은 어쨌든 좋은 때를 잘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거니까.


 여름이면 무더운 볕 아래에서 옥수수 껍질을 벗겨내던 사장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그립다.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고장에서 차 타고 온 싱싱한 작물을 일일이 손질하시던 사장님. 올여름에도 국내산 제철 옥수수 많이 팔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중국산 옥수수를 먹는다. 사 온 건 먹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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