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물방울에 담긴 이야기

지구의 모든 이야기가 담긴 물방울을 소개합니다.

by 별글이


겸의 코로나와 강의 폐렴 그리고 다시 겸의 폐렴. 집안의 돌림병이 도는 동안 저도 좀 아프며 8월을 집에서 보냈어요. 너무 억울한 거예요. 사계절 중 하늘이 가장 아름답고 바다에 들어가 첨벙거리리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을 집에서 에어컨도 못 틀고 있으려니까요. 아이들이 낫기만 하면 물놀이를 가겠다며 벼르고 벼르며 땀과 함께 버티고 있었어요. 타오름 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8월의 별은 최고 속도로 달리는 증기 기관차의 화구처럼 활활 타올랐어요.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죠?) 기세 등등하게 달리던 계절의 종착역은 그래도 9월 말은 될 줄 알았는데. 처서가 지나자 햇볕의 온도는 정차할 역을 놓칠까 봐 물을 퍼부은 기관차의 화구처럼 식어버렸네요.


아쉬워요. 물놀이도 여행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여름이라서요. 친구들은 코로나도 잊은 채 훌훌 떠났다 돌아왔는데. 저는 방구석 랜선 여행으로 마음을 달래 봅니다. 그러다 문득 "물"과 "여행"으로 지어진 그림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찾아 꺼냈습니다. 바로 그림책 [어느 작은 물방울 이야기]입니다.

이건 내 이야기야.
아주 짧은 이야기지.
나는 작은 물방울이야

작은 물방울은 자기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작은 물방울은 빗방울도, 이슬방울도, 바닷물 방울도 아닌 도시의 물방울입니다. 수도관을 달리고 달려 오늘 수도꼭지로 빠져나온 물방울이지요.

어쩐지 불안해.
저 깊은 곳으로
되돌아갈까?

햇살이 닿을 때마다 작은 물방울과 언니들은 무지개색으로 빛납니다. 하지만 어두운 곳으로 가면 색이 없는 액체일 뿐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작은 물방울은 저기 아래로 보이는 깊고 어두 컴컴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낯선 어둠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한 발 내딛기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 곁에는 깊고 어두운 곳을 함께 견딜 언니들이 있어요.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 뛰어들 때 새로운 모험이 시작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지요.

캄캄한 두려움을 뒤로한 채 작은 물방울은 깊고 어두운 관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작은 물방울은 알고 있어요. 이 길고 지루한 어두움이 곧 있을 여행의 출발지라는 것을요. 아주 작은 물방울의 두려움은 놀라운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상기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속도를 내어 달려갑니다.

언니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과 자기가 직접 경험했던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작은 물방울은 길고 지루한 어둠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다다른 곳은 다시 도시 한가운데. 하지만 물방울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여행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요.


작은 물방울은 사실 지구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놀라운 여행자입니다. 우리의 발이 닿지 못하는 곳,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까지 다녀왔을 테지요. 때로는 정글에서 열대 식물을 키우고, 때로는 북극의 빙하가 되어 북극곰의 안락한 터전이 되어 줬을지도 몰라요.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며 세상을 관망하다가 느닷없이 내려올 테지요. 도시 어느 곳에 내려앉아 미로 같은 수도관을 지나야 할 때도 있지만 아주 잠깐이면 또다시 새로운 미지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토록 자유로운 여행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저는 오늘도 제가 하고 싶은 여행을 하지 못 한 아쉬움에 신세 한탄을 하며 작은 물방울이 되어 여행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저는 항상 유럽으로 여행을 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배낭여행에 대한 환상이랄까요? 배낭여행 이야기 속에는 없는 돈을 쪼개 쓰고 그래도 모자라면 물건을 팔고 싼 숙소를 전전하며 불편한 쪽잠,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진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꼭 음악의 사비처럼 들어있어요. 처음 듣는 낯선 노래도 반복되는 사비는 귀에 쏙 들어오는 것처럼 배낭여행에 대한 찬가는 제게 사비만 남아 더욱 저를 부추겼지요. (만약 소매치기니, 인종차별이니, 범죄니 하는 이야기만 들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보수적이고 엄격한 부모님과 겁이 많은 저의 성격은 제 발을 묶어 두었답니다. 결혼 전까지 배낭여행은커녕 한반도를 떠나 본 적이 없었어요. (제주도를 결혼하고 삼십 한 살에 처음 갔으니 말 다 했죠?) 삶이란 게 그렇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는데 제겐 용기도 응원도 없다 보니 항상 남들을 부러워하며 무기력과 우울로 가득 찬 마음의 무게를 버티며 삶을 걸어왔지요. 저를 향한 날 선 원망도 참 많이 했었네요.


작은 물방울을 보며 묻습니다. "꿈꾸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니?” 숲이 우거진 강을 달리고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넘실거리는 것이 물방울의 꿈이 아닐까 싶어서요. 하지만 물방울은 그저 주어진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며 꿈을 꿀 뿐, 어디에 있든 어디를 가든 나는 작은 물방울이고 이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이야기가 오늘의 나를 이루는 근원이라면서요. 언젠가 원하는 곳에 다시 닿을 것을 믿으며 의연하게 오늘을 살아내지요. 과연 태초의 지구와 함께 해 온 물방울의 유구한 연륜이 느껴지는 대답이지요?


삶이란 때로 작은 물방울이 두려워한 "깊고 어두운 곳"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늘도 꿈을 꾸고 소망합니다. 작은 물방울의 곁에 언니들이 있는 것처럼 제 곁에서 조건 없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물방울처럼 언젠가 닿을 것을 믿으며 길고 긴 인생의 터널 속에서 마음의 불을 켜고 오늘도 걸어가 볼 거예요. 예측 할 수 없는 미래로 밀려오는 두려움은 새로운 여행이라는 설렘으로, 변화 앞에서 망설임은 강단있는 성실함으로 진정성있는 삶을 살아 보려고 합니다.



꿈을 이룬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하지 말고 그저 자신을 믿고 그 꿈을 꾸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라는 이야기지요. 그 성실한 순간들이 모이면 언젠가 저도 제가 꿈꾸던 숲에서 원없이 달리고 있지 않을까요. 그 날을 기다리며 태연하고 의연하게 내일을 맞이하겠습니다.


이런 다짐에도 나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화장실의 작은 물방울에게 이렇게 물어볼 작정입니다.

"넌 무엇을 꿈꾸니?”


그림책의 메시지: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이 세상에 시,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어 꿈, 성실, 진정성이란 진실된 가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 속에는 당신의 이야기도 있답니다. 아주 작은 물방울 속에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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