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구경도 못 했는데 목 메이네
연휴 첫날, 남편이 테니스를 치러 나가자고 한다. 어제 워터파크 나들이에서 돌아와 추석 준비는커녕 아침 점심 먹을 것도 없는 냉장고 때문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던 나는 테니스라는 말에 그만 생각의 끈을 놔 버렸다. 테니스는 정말 재밌으니까 비록 포핸드만 배운 테린이지만 오늘은 쳐야겠다. 나는 개며느리가 될 거야!!
잔잔한 흐름 속에 가을볕은 맹렬한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공 한 박스를 받아치고 나니 땀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젖은 바람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건조한 바람이 뽀송뽀송한 수건처럼 땀을 닦아준다. 아직은 기술도 힘도 부족한 나. 특히 라켓에 공이 닿는 순간 손이 풀려 라켓이 돌아간다. 하지만 창의적 좌절은 금지라던 김미경 선생님의 말씀을 새기며 한 카트 가득 들어있던 공을 쳐낸다. 로봇 같은 스윙이 제법 사람다워졌다. 늘었다!
박스 공도 아닌 카트 공을 치고 나면 삼두근이 욱신욱신한다. 아이고, 팔 아파. 땀도 한 바가지 흘렸더니 밑바닥 체력까지 동 나 버리고 피곤해 잠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내일은 추석. 갑자기 텅 빈 냉장고가 생각났다! 몰려오는 스트레스 속에서 추석 당일과 이튿날은 식당이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는 합리적 근거로 나를 설득하며 무거운 팔을 낑낑 들고 장을 보러 갔다.
일이 년 전만 해도 명절이면 잡채와 대구전을 했고 콩나물은 맵지 않게 무쳤다. 그러나 개며느리가 되기로 결심한 뒤로 이 메뉴들을 깔끔하게 버렸다. 매운 것을 못 드셔서 고춧가루 팍팍 넣은 음식 올리면 서운해하시고 명절이면 은근 구색 맞추기를 바라시지만 어쩔 수 없다. 매운 콩나물 무침은 남편의 최애 메뉴, 대구전보다 육전을 더 잘 드시고 잡채는 나랑 애들만 먹으니까.
한 때는 이곳저곳 유명한 곳에서 명절 음식을 사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맛이 없어 다 버린 뒤로 사자는 말씀이 없으시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안될 노릇이었고. 밥 차리는 입장에선 어쨌든 버리는 것 없이 다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가게 경제와 지구 환경, 내 자존감 방어를 위해 좋다. 난 나와 아이들을 위해 음식 하는 거라며 마음의 불을 끈다. 다행이라면 “밥상 차림 경력 11년”이 빠른 손과 섬섬한 맛을 보장해 준다는 것. 그리고 “남편과 아들 사이 경력 11년”바깥양반이 설서지와 주방 보조역을 확실하게 해 주고 있어 장보는 일까지 3~4시간이면 명절 준비가 끝난다. 하긴 평소 먹는 음식들에 전만 추가하니, 장 볼 때 돈이 좀 더 들뿐 명절이라고 특별한 날도 아니다.
제사 지내는 집은 아니다 보니 명절을 핑계로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전을 지지고 마늘 잔뜩 넣어 나물을 볶는다. 이번 추석 메뉴는 참치 두부전, 육전, 연근튀김, 오이, 도라지, 고사리 볶음 나물 3종과 무생채, 매운 콩나물무침. 우리가 친정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님 혼자 챙겨 드실 수 있게 양지 육수 푹 끓여 소고기 뭇국도 끓인다. 소고기 뭇국 소식에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하시는 어머님의 얼굴을 보자니 왠지 모를 패배감이 올라온다. 육전도 양지도 씹기 좋게 연해 어머님께 합격점! 그런데 왜 표정이 안 좋으실까? 대충 짐작은 가지만 이래저래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매년 명절 점심은 불고기를 구웠지만 고깃값이 하늘 꼭대기라 삼겹살과 알배기로 어머님께서 진심으로 좋아하시는 일본식 수육을 해 추석 점심을 먹는다. 냄새로 이미 다 먹은 음식들 대신 칼칼한 라면이 간절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라면 절대 안 드시고 먹으면 타박 한 소리 하시기에 라면 냄새를 상상하며 점심을 먹는다. 눈치 없는 우리 엄마는 아침 먹고 오냐고 물어보는데 점심 먹고 간다는 말을 하며 괜히 짜증이 올라온다. 괜한 걸 왜 묻는 거야, 엄마!!
개며느리 되고 싶은데 언제나 모든 중심에 어머님이 계신다. 아직도 개며느리 되긴 멀었구나. 도대체 나는 무엇에 홀려있는 것일까? 추석, 고구마 구경도 못 했는데 목이 콱 막힌다. 소화가 안된다. 라면 국물 한 숟갈이 간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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