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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Sep 20. 2022

애 아플 때 제일 속상한 사람.

당연히 엄마 아니에요?

새벽, 강이 급하게 나를 찾았다. 잠결에도 아이의 소리가 투정인지 아픔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엄마라는 존재들. 그중엔 나도 있다. 생각이 대뇌에 닿아 소뇌에 지시하기 전에 벌떡 일어나 손을 뻗어 입을 받쳤다. 왈칵왈칵 토해내는 저녁거리들. 밥 주머니 주먹만 한데 떡국 먹고 가래떡 구이 또 먹는다, 놀린 얄궂은 엄마인 나는 아가가 힘겹게 뱉어내는 것들을 보며 눈도 마음도 따갑다. 괜히 놀렸네, 안 그래도 체중 미달인데. 토를 받아내며 남편을 불렀다. 두 손 가득 차 버린 토사물이 넘치기 직전이었으니까. 세상모르고 자는 잠만보 남편도 내 목소리 한 줄기면 벌떡 일어나 정신을 차린다. 남편이 아가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고 나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다. 7, 8월 내내 참 많이 아팠던 강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빛처럼 떠올라 스쳐간다.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나름 많은 육아 공부를 하고 개똥철학을 세워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다. 그 개똥철학에 홍대병이 더해져 겸과 강의 유년 시절은 온통 공동육아로 채워져 있다. 7세까지 인지교육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자연과 자율 속에서 놀던 겸은 8세가 되던 해부터 학원 대신 엄마표 영어로 영어를 습득하고 있다.

(강도 같은 길을 걸어갈 예정.) 그런 우리를 보며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시어머님. 남편 위로 누나 세 분이 서울 강남에서 자식 교육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며 키우셨는데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내가 책 읽기 외엔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도 시키지 않자 내내 옆구리를 찔러대셨다. 겸이 혼자 한글을 습득하고 엄마표 영어 시작 만 2년 만에 원서를 읽고 뜻을 파악하고 쓰고 말하며 놀게 되자 비로소 어머님의 팔꿈치는 쭉 펴졌다. 심지어 지금은 누나들에게 때 자랑을 하신다.


그런 시어머님과 함께 살며 제일 힘든 때는 강이 아픈 날이다. 새벽에 토를 한 강을 병원에 데려갔더니 장관보다 호흡기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강은 감기에 걸리면 장염 증세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집에 오자마자 병원에서 항생제를 제외한 점심 약을 먹이고 상황을 지켜봤다. 시간이 저녁으로 흘러갈수록 강이 쳐진다. 자꾸 할머니처럼 다리가 아프다며 끙끙거린다. 간격이 짧았지만 이번에는 아침저녁 복용으로 처방받은 항생제와 함께 다시 약을 먹였다.

다만 해열제를 좀 아껴 쓰는데, 열 경기하는 아이가 아니라면 시간을 두고 지켜봐도 된다는 육아 선배들의 이야기와 '야옹 선생의 초록 처방전'으로 유명하신 박지영 원장님의 이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육아 철학이나 노력 따윈 관심 없으신 어머님은 유독 강이 아프면 무조건 약을 먹이지 않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며 병원 데려가라, 약 먹여라, 해열제 먹여라 잔소리를 늘어놓으신다.


역시 오늘도 출타하셨다 돌아오신 어머님은 열이 난다는 강의 소식에 여지없이 나에게 '약 먹여야지(먹였어요, 어머님)', '병원에서 약을 한 번 먹을 것만 지어 줬냐(그럴 리가 있나요?)', '해열제 먹여라(먹일 때 되면 먹이지요)', 강의 엄마로 빙의해 반갑지 않은 "약 먹여라 3종 세트"를 선물로 주신다. 저녁 식사 전 이미 화가 끝까지 차 버린 나를 알아챈 겸은 화가 난 이유는 몰라 식사 내내 '엄마 매운 거 좋아하냐 매운 거 언제부터 잘 먹었냐 나는 잘 먹냐'는 수다 폭격으로 자기 때문은 아니란 걸 확인받으려 하고 그 와중에 강은 밥을 먹네 마네 하며 화장실로 뛰어가고 있으니 내 정서가 한계치를 넘어선다.

친구가 보내준 고마운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겸! 엄마 지금 너무 정신없어. 그리고 매운 음식 먹을 때마다 물어보니까 체 할 것 같아. 엄마가 매운 음식 좋아하고 잘 먹는 걸 겸도 이제 다 아는데 그만 물어봤으면 좋겠어!", "강! 이거 줘 아니고 무나물 달라고 해!" 라며 단호와 호통 사이 톤으로 쏘아댔다. 물론 이 화는 겸과 강의 것이 아닌데, 엄한 아이들만 또 한 소리 듣게 되어 화가 더해진다. 그러나 한 치 오차 없는 박자로 차지게 치고 들어오는 눈치 없는 소리. 소파 지정석에 자리보전하고 앉아 계신 어머님의 "쳇!" 소리. 내가 아이들에게 언성을 높이면 매번 듣는 소리.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


목이 메게 퍽퍽한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좋아하던 내가 어느 순간 닭날개와 호박고구마만 먹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까? 물론 닭날개는 콜라겐 섭취라는 다른 목적도 겸하고 있으나, 이미 눈치 없이 날아든 어퍼컷으로 뻐근해진 울대와 명치를 가지고는 사실 닭날개와 호박 고구마는커녕 물 한 모금 삼키기 힘들다. 밥 주머니로 뻗어있는 길이 입구부터 꽉 막혀 연하 운동이 전혀 되지 않는다.


안 그래도 강이 매 달 아파 엄마로서의 자격 유무를 따지며 깊은 자기 검열 중인 나를 어머님은 알고 계실까? 아니, 절대 모르신다. 그러니까 당신 어린 시절, 딸이라 천대받았던 속상한 마음을 강에게 투사하며 겸이 아플 땐 절대 하지 않는 잔소리를 퍼부으시지. 겸도 지금 계절성 알레르기로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눈가 피부가 다 짓물렀는데 안과 데려가라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으니까. 마음 같아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 뒤집어엎고 막장 드라마 시나리오 10,000페이지  쓰고 싶지만 아이들 앞에서 차마 밑바닥을 드러낼 수 없으니 저녁이고 나발이고 바람 빼는 튜브 마냥 튀어나온 입을 틀어쥐고 쒹쒹대며 안방으로 튀어 들어간다.


어둠 속에서 끙끙 대는 강의 다리를 주무르며 타는 눈물을 참아 본다. 또 목이 메어 아프지만 차라리 아픈 게 낫다. 나는 어머님을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님은 나에게 한 말이 아니라 당신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아홉째 딸이라고 태어난 날부터 방치해 둔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리고 나는 세상 제일 멋진 겸과 강의 엄마이지 어머님의 엄마가 아니니까 스트레스받지 말자, 수천번을 되뇌며 강을 재운다.


오늘도 고구마 한가득 입에 물고 하루를 흘려보낸다. 언젠가 고구마 라테로 바뀌는 날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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