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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an 24. 2023

개딸로 살기

엄마가 원하는 페르소나를 버리다.

착한 딸로 산 인생이 더 오래되었으니 그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35년을 엄마의 착한 딸로 살았다. 세상에서 우리 엄마만큼 나를 사랑하고 멋지고 당차고 안타까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엄마 말 안 들으면 나만 손해지.’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래서 처음 결혼하고 몇 년은 집에서 밥을 못 해 먹으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착잡했다. 매일 일거수일투족 공유하는 딸이었기에 힘들어서 어제저녁은 사 먹었다 하면 나 어렸을 적, 고단했단 당신의 인생 이야기 한 소절과 함께 반찬을 보내준다는 엄마의 레퍼토리 탓이었다.


나는 매번 싫다 거절했고 그때마다 사 먹지 말고 받아먹으라는 엄마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았다. 복에 겨운 소리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입 짧은 시어머님이 이건 맛있네, 저건 어쩌네 하며 드시다 남은 반찬을 버려야 할 때, 못난 딸 때문에 엄마가 딸 시집살이까지 한다는 생각으로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의 착한 딸’ 인생에서 벗어난 계기가 있다. 바로 개인 상담. 그때까지 엄마가 시키는 데로만 살던 수동태 인간이던 내가 친한 언니들의 배려로 모임에 합류해 집단 상담과 개인 상담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강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부담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걱정과 달리 집단 상담 첫날 강은 유모차에서 평화롭게 잠을 잤고 편안하게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뒤로 개인 상담 1회기 (12회)를 모두 강과 함께 다니며 상담 선생님의 도움으로 엄마가 씌워 놓은 투명하고 견고한 유리 돔을 깨 부실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지만 언제나 나는 잘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 시작도 못 하고 남들 부러워하기만 했다. 그런데 개인 상담을 하며 그 이유를 알았다. 예기 불안이 높은 엄마가 언제나 나는 딸이란 이유로, 겁이 많아서,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칠칠치 못 해서, 당신 치마폭에 싸 두었던 탓이었다.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 나는 안돼. 네까짓게, 뭘 할 수 있겠어. 엄마 말이나 잘 듣자.‘ 는 말들이 사실 엄마가 내게 한 말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한 달을 미친 듯이 방황했다. 그전까지 세계 최고의 완벽한 인간이었던 우리 엄마도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고 높은 불안 때문에 딸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당신 곁에 메어 놓았던 것이다.


그 뒤로 내 발로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찾아가 5년을 참여하고 있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걱정을 접어두고 하는 인간이 되었다. 언젠가 엄마 때문에 친구들은 오대양 육 대륙을 다 찍는 동안 나는 단 한 곳도 못 갔다고 미친 듯이 화를 낸 적도 있다. (사춘기 때도 그런 적 없었는데!) 물론 돌아오는 말은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겁도 많은 게 퍽이나 갔겠다!” (엄마가 내 월급을 몽땅 다 관리해서 결혼 전까지 경제권이 없었다.) 우리 엄마는 바꿀 수 없지만 내가 바뀌었으니 그것으로 됐다. 나는 이제 엄마의 착한 딸 페르소나를 버렸다. 그냥 개딸이다.


얼마 전 도서관 짝꿍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자꾸 떠올라 키득거린다. “내 엄마니까 만나는 거지, 친구로 만났으면 나는 우리 엄마랑 절대 친구 안 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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