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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an 25. 2023

우리 모자는 진화 중

아들아, 포켓몬스터가 되어라.

겸이 어제 점심을 먹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탈이 난 모양이다. 외할머니가 손자 좋아하는 갈비를 잔뜩 해놨다고 신나고 급하게 먹은 탓이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한 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원서 읽기와 흘려듣기를 하는 녀석. 그런데 저녁을 먹을 때 즘 열이 나며 상태가 나빠졌다. 일찍 자자, 권했더니 자신은 게임을 꼭 해야겠다고 한다. 나는 다른 쪽으로 열이 올랐다. 아니, 저렇게 힘든데 게임을 하겠다고?


최대한 나의 열을 숨기고 게임을 하고 난 후 일기 쓰기와 독후활동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겸은 나의 눈에서 불을 보았나보다. 자기를 못 믿는 것이냐며 버럭버럭 화를 낸다. 더 말하지 않고 게임을 허락했다. 30분을 멀쩡하게 앉아 게임하는 모습을 보며 혹시 게임을 못 해서 열이 난 건가 싶었다. 하지만 게임을 하고 난 후 사태는 심각해졌다.


어지러워 죽겠다는 겸. 하지만 겸은 아까 나에게 아주 큰 소리를 쳤기 때문에 꼼짝없이 잡혀 앉았다. 일기를 써야 하는데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다른 쪽으로 열이 오를 데로 오른 나는 겸을 혼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아까 했던 그 말이 잔소리처럼 들려서 듣기 싫었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화내며 호언장담한 건 경솔했다고. 내가 화를 내지 않고 말했던 만큼 너도 그런 말을 들으면 싫다고 정중하게 말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예의를 지키는 것이 너를 지키는 것이라며 혼을 냈다. 그러자 겸이 울면서 말했다.

미안해. 그런데 엄마가 그 말하니까
나를 못 믿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어.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어. 그냥 알겠다고 허락해주기만 하면 될 것을 또 나는 파충류의 뇌로 악어엄마가 되어 버렸다. 울면서 일기를 쓰는 겸에게 독후 활동은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다음 주에 내고 일기만 쓰자, 제의해 본다. 하지만 펑펑 울어버린 데다 컨디션도 안 좋은 겸은 일기 쓰기 조차 버겁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 쓰며 앉아있는 겸에게 만회할 방법을 궁리했다.


"겸, 나도 오늘은 그림 그리기 정말 싫다. 저 바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바다인데 꼴도 보기도 싫네. 오늘 그리면 세 번짼데 지겹고 다시 그릴려니 엄두가 안나. 그래도 나는 그릴 거야. 나의 이 싫은 마음 잘 달래서 해내고 잘 거라고. 왜냐하면 나는 진화해야 하니까. 너도 진화해야지. 포켓몬들은 진화하면 완전 다른 포켓몬이 되잖아? 우리도 그렇게 지금이랑 완전히 다른 우리가 되는 거야. 그럼 지금 좀 힘들어도 이것만 해내보자. 포켓몬들은 자신의 트레이너와 아주 친해져야 메가 진화하잖아. 우리의 트레이너는 우리 자신이야. 우리가 이 싫은 마음 잘 달래고 나와 친해졌을 때 메가 진화할 수 있는 거야. 우리 천년만년 아이로 살 수는 없잖아. 우리 진정한 남서영과 진정한 00겸으로 살아야지."


역시! 쓰러져있던 몸이 일으켜 세워진다. 눈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지금이랑 완전히 다른
김예겸으로 진화한다는 거지?
포켓몬처럼?


먹혔다. 겸은 그렇게 일기를 마무리하고 잠이 들었고 오늘 아침 학교에 갔다. 물론 컨디션은 하룻밤 새 좋아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포켓몬이자 트레이너라도 된 것처럼 몸은 안 좋지만 열은 안 나니 학교에 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나는 어젯밤 단언한 데로 새벽 세시에 나의 세 번째 바다 그림을 완성시겼다. 역시 호언장담은 경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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