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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Feb 13. 2023

방청객이 돌아왔다.

슬기로운 방청객이 되기로 했다.

내향적인 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아이. 그 아이는 누군가 말을 걸어 주면 제일 행복해했고 손을 내밀면 덥석 잡기 바빴다. 이십 대 때 별명이 방청객이었던 나는 내 안의 아이가 혐오스러웠다. 살아오는 내내 내향적인 나의 아이를 부정하고 강박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인 채 하며 사람들 틈에 끼여 노력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으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경주였으므로 항상 우울했다.


관계 속에서 속에 없는 말을 뱉을 수 없는 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모두 신실한 말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세상을 떠돌다 내 귀에 내려앉아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매 순간 진심으로 나누웠다던 시간은 어떤 이들에게는 피상적인 시간으로 지워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 속에 삶을 묻어 버렸다. 그 소모적 관계를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면 늘 외로워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싶었다. 바로 서 있지 못한다면 나의 세상은 아무도 받쳐주지 않을 텐데 대책 없이 흔들리고 있어 될 일이 아니었다. 나를 알아야 했다. 아직 무엇이 묻혀있는지 모르는 갱도처럼 나의 마음 깊은 곳까지 곡괭이로 파 헤쳤다. 나의 외로움의 근원이 어린 시절에 있었다. 무서운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밖으로 나가지만 결국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울고만 있던 다섯 살의 나. 그 아이를 꼭 안아준다. 괜찮다고, 너로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외로울 때마다 찾아가 달래줬다. 그러자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에게 사람들과 어울릴 것을 가혹하게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별명이 방청객이던 내가 다시 돌아왔다. 아니, 지금껏 쌓아 올린 지혜를 토대로 들을 수 있는 슬기로운 방청객으로 성장해서 돌아왔다. 귀는 타인의 소리에 집중하고 눈은 그의 행동과 일상의 맥락을 쫓아다니며 말과 행동과 그 맥락의 모순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행 불일치한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관계 안에서 진솔한 말을 아껴야 한다는 걸 배웠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관계 맺음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기대와 미움으로 소진해 늘 부족하던 시간들이 남아 돌기 시작했다.  


모든 관계를 다 끊어내고 혼자 고결한 사람처럼 내숭 떨며 살 수는 없다. 관계 안에서 상처 잘 받는 소심하고 내향적인 나이지만 또한 관계 안에서 그 상처를 회복하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대신 나를 판단하는 이야기는 흘려버리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 둔다. 그리고 가끔 외로운 마음이 들 때 하나씩 까먹으며 마음을 채운다. 외로움에 휩쓸려 누군가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만남 뒤에 쏟아지는 찜찜한 공허에 내 삶을 다시 묻어버리기에는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음으로.


내 안의 아이는 요즘 행복하다. 그만이 가진 성격을 마음껏 뽐내며 책 속을 헤집고 다니고, 쉴 새 없이 나와 글로 수다를 떨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골라 그림을 그린다. 맞지 않아 불편함으로 일그러진 못생김 대신 자유 안에서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그 특유의 미소를 머금는다. 그토록 혐오했던 방청객의 삶을 다시 살게 된 나를 격하게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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