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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Mar 04. 2023

무늬만 엄마

나도 응용력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강을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 중에 자연을 주제로 한 책이 있었다. 아직 글을 모르는 일곱 살이지만 보고 들은 게 워낙 많은 아가는 심각하게 책을 본다. 지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진 사진, 토네이도가 휩쓸고 가는 사진, 쓰나미 사진을 보다가 물어본다. “그런데 지진은 왜 나는 거야?”


지적 허영이 넘치는 열한 살 겸은 강의 표정 따위 안중 없이 들어온 질문에 신나 대답한다. “응, 바다에 있는 땅이 이렇게 꺼지기도 하고 솟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럼 바닷물이 출렁거리게 돼서 엄청 큰 파도가 몰려와.” 온몸을 일으켰다 앉았다 하며 일곱 살 수준에 딱 맞는 훌륭한 답변을 한다.


그런데 강이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겸은 당황했다. 도대체 어느 대목이 슬픈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임에도 타고난 공감 능력으로 늘 주변인들을 놀라게 하는 겸에게도 강은 늘 어려운 존재다. 공감을 책으로 배운 나는 더할 나위 없고.


당황한 우리 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훌쩍이는 강을 앞에 두고 난감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내가 엄마니 강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왜 울어, 아가?” 그랬더니 개미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 “


지진을 경험해 본 적 없는 강이 겸의 설명과 책 속의 사진으로 지진이 무섭다며 울고 있었다. 겸이 뒤늦게 지진은 지구가 딸꾹질 하는 거라며 수습을 시도해 보지만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겸은 4살 때 지진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때 놀란 겸에게 우리는 지구가 딸꾹질 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 말에 깔깔 웃으며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지진은 지구가 딸꾹질 하는 재미있는 자연 현상이라고 겸의 기억에 남았다.) 딸꾹질을 하는데 왜 땅이 갈라지고 파도가 몰아치냐며 옷이 다 젖겠다고 오빠에게 화까지 낸다. 이렇게 무서운 책을 어떻게 아기들이 보냐며 서평 한 마디도 하시고.


눈물 뚝뚝 흘리는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니 진심으로 무서운 모양이다. 엄마가 강을 지켜준다는 말에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고개를 젓는다. 지진 나는 마당에 엄마가 나를 어떻게 구하냐는 말이었다. 엄마는 나 못 지킨다며 우는데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울고 있는 강을 끌어 안아 부드럽게 어르며 얼굴을 들여다봤다. 통통한 볼이 둥그렇게 흐르는 얼굴선. 그 위로 큰 눈에 오뚝한 코가 공포에 일그러졌다, 펴졌다 하는 게 마냥 사랑스럽다. 종알종알 말 뱉어내는 입술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인형인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그런 감상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겸은 쉴 새 없이 강에게 설명한다. 일본만 안 가면 돼, 바닷가에만 안 가면 돼, 우리나라는 지진이 심하게 나지 않아… 설득이 될 리가 없다. 강은 연신 눈물을 훔치고 나는 그걸 애틋하게 보고 있고 겸은 계속 당황하며 설명하고 있었다.


온갖 감정이 혼재하던 그 시각, 딸바보 남편이 돌아왔다. 그 남편은 딸이 울고 있으니 무슨 일이냐며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한다. 지진 관련 책을 보고 무섭다고 울고 있다 하니 바로 하는 한 마디. “딸! 우리 집은 지진 나도 절대 안 무너져! 걱정하지 마! “ 문득 뇌리에 오은영 박사님의 말 한마디가 스친다. ”아이가 만 10살이 되기 전까지 부모님은 절대 안 죽는 슈퍼맨이어야 합니다. “


아이들에게 부모의 상실만큼 큰 공포가 없으므로 아이들에게 그런 거짓말은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말이 비단 부모의 죽음에만 적용할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다. 강은 오빠의 현실적인 조언도 다 부질없다는 듯 화냈고 엄마가 지켜준다는 말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더 슬퍼했지만 남편의 ‘우리 집은 절대 무너지지 않아’라는 거짓말은 철석같이 믿으며 울음을 그쳤으니까. 응용력 좋은 남편이 육아도 가끔 잘할 때 나는 무늬만 엄마가 된다. 아, 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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