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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Mar 20. 2023

호박씨 까기

속에서 화기가 느껴지는 오늘 분노를 담아 자판을 찍는다.

같이 산지 12년. 난 아직도 시어머니한테 속수무책 당한다.


12년째, 함께 사는 시어머니는 1년에 여러 번 내 속에 불을 던져 놓는다. 횟수와 상관없이 방화로 지펴진 불은 내 마음을 새까맣게 태우는 것도 모자라 병까지 남긴다. 재가 되면 날아갈 텐데 미움으로 무거워진 덩어리들은 끈적한 타르로 남아 마음에 들어차 버린다. 당신이 뱉은 말은 돌아서면 잊어버리시니 내가 왜 화가 난 줄은 관심 없이 그저 내 행동 하나하나에 못된 며느리라는 꼬리표만 붙이고 계시겠지. 그래 난 개며느리 꼬리표가 낫다. 난 착한 며느리는 되고 싶지 않다, 죽어도.


그런 의미에서 이 방화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한 번 따져 보아야겠다. 남편을 봐서 참고 싶었지만 결국 넘어가지 못하고 따지는 이유는 그래야 마음에 불이 좀 꺼지고 전소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이실직고한다. 나는 지금부터 시어머니에 대해 호박씨를 까겠다.


때는 바야흐로 꽃이 피려고 하는 계절이다. 봄과 겨울이 서로에게 밀리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결국 세상은 봄이 준비한 새 옷을 갈아입으려 준비 중이다. 곳곳에 때를 알리는 매화와 목련이 탐스러운 꽃을 틔우기 시작했고 개나리가 얼굴을 내밀었으며 벚나무엔 진분홍 꽃봉오리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진달래는 원래 기약을 알리지 않는다. 어느 날 돌아보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으리. 봄은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데려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하지만 불행은 늘 좋은 일을 동행하고 나타나니 계절이 바뀌는 지금 독감이 대대적으로 유행 중이다. 기억에 겸도 항상 3~4월이면 예방 접종이 무색하게 꼭 걸리던 독감. 지금 그 독감을 강이 앓는 중이다.


햇살은 따뜻하나 아직 바람 끝엔 겨울이 실려와 차가운 지금, 땀을 흘리며 놀고 나면 아이들은 자신이 한여름에 살고 있는 착각을 하곤 한다. 강도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이 홀딱 젖어버릴 만큼 땀 흘리며 놀고 겉옷을 입지 않으려 한다. 물론 강제로 입히지만 지퍼를 채우지 않은 채 겨드랑이 사이사이 바람을 꽂으며 시원하다고 다닌다. 한여름 차가운 에어컨 바람 한 번에 폐렴으로 한 달을 고생하는 아가가 겨울이 실린 바람은 얼마나 치명적일까? 며칠 밤낮으로 그렇게 놀더니 결국 오랜만에 다니러 간 친정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프다고 펑펑 우는 강의 컨디션을 살피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서글펐는지 모른다. 그렇게 도착해 강을 엎고 올라온 나에게 어머님이 물었다. “왜 업고 와?” 갑자기 열이 오르고 많이 아파서 업고 왔다며 정신없이 강을 내리고 약을 찾는데 나를 보며 웃으며 어머님은 한 마디 더 보태셨다. “그래. 친정 가면 원래 애가 아픈 거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 자리에 강이 없었다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아픈 강에게 엄마가 화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불안까지 안길 수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이성을 부여잡고 어머님 얼굴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본인의 실수를 인지한 어머님은 바로 말을 고치신다. “친정이든 어디든 나다니면 애가 아프지.”라고.


내 마음을 불구덩이로 만들어 놓고 선 방으로 들어가신다. 화가 나서 꼭지가 돌 것 같아 남편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일 때문에 하루 종일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이르는 정도로 끝냈다. 그리고 오늘이 되니 그 불은 여전히 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예전처럼 나를 통째로 삼키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머님의 방화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화를 꺼뜨릴 수 있을까? 잘 참았다는 응원의 말, 어른들 말에 상처받지 말라는 헛소리에 무시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나는 오늘 이 뜨거운 불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지 꼭 답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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